인천광역시립박물관 | 인천 역사의 모든 것!
서울에 있는 박물관 중 국립으로 시작하는 박물관은 거의 다 가본 듯하다. 그러다 보니 상설보다는 기획전시를 주로 다니고 있는데, 요즘 볼만한 전시가 없다. 이럴때는 시선을 넗혀야 하므로, 서울을 벗어나 인천으로 간다. 그 시작은 인천 역사의 모든 것,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1945년 4월 1일에 개관을 했다. 첫 박물관은 송학동 세창양행 사택이었고, 두번째는 제물포구락부 건물이었다. 연수구 옥련동 터는 세번째이며, 2027년에 학인동에 건설 중인 뮤지엄파크로 이전을 한다고 한다. 야외에도 볼거리가 있지만, 사진 한도초과라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인천에는 구석시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신석시시대는 중요한 먹거리인 해산물을 얻을 수 있는 바다와 갯벌 주변에 사람들이 살았다. 강화도와 영종도, 백령도 등 인천의 거의 모든 섬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됐고, 영조도와 삼목도, 강화도는 집자리와 화덕자리가 조사되는 등 많은 수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됐다.
농경은 청동기시대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화도와 서구 검단, 문학산 일대를 중심으로 고인돌이 밀집해 분포하고 있으며, 원당동과 동양동 등의 얕은 구릉지대에서는 집자리와 석관묘가 발굴됐다. 여기서 민무늬토기와 돌도끼, 돌화살촉, 반달돌칼 등이 출토됐다.
미추홀은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비류가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비류의 남하과정은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분기에는 비류가 해안가에 정착했다고 했으며, 같은 책 지리지에는 그곳이 미추홀 곧 현재의 인천이라 기록했다.
해상활동에 기반한 고려왕실은 예성강 하구로 통하는 강화와 교통, 영종도를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정비했다. 강화는 약 40년간 몽골침입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던 고려왕조의 도읍으로, 이때를 강도시대라 불렀다. 이 시기 강화에는 개경의 도성 구조를 옮겨 놓은 듯한 대규모 성곽이 축조되고, 외성과 같은 해안방어선을 구축했다.
강도시대 강화는 대몽항쟁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금속활자의 발명,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기법의 개발 등 문화적으로도 그 위상이 극에 달했다. (강화에 유적지가 많은 이유)
조선 태종 13년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주가 인천군이 되면서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강화는 조선 초기 도호부가 되었다가, 정묘호란 직후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종2품 벼슬의 유수가 부임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인천 지역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수산업이었다. 교동을 제외한 인천, 부평, 강화의 농토는 대체로 비옥한 편이었고, 특히 강화는 섬이지만 고려시대 이후 계속된 간척산업으로 농토가 가장 비옥하고 넓었다.
조선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장시(지금의 시장)가 곳곳에 형성되어 5일장이 열렸다. 인천의 석암장과 사천장, 부평의 발아장과 황어장, 강화의 부내장, 철산장과 온수리장 그리고 교동의 읍내장 등 인천 지역에는 모두 8곳의 장시가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은 강화도를 보장처로 삼아 방어시설을 축조하고 국가시설을 이전하는 등 비상 상황의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1680년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홀 등이 강도 돈내에서 사용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어 진상하니, 무게는 100근이다. (불랑기 사진에 나와있는 글)
여기서 잠깐, 보장처는 국가의 외침이나 내란 등의 위급한 사태에 처했을때 조정과 왕실이 임시로 피난해 보호받고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인천은 서울에서 가까웠기에 서구 함대의 침략 무대가 되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와 충돌한 병인양요(1866년), 미국이 대동강에서 침몰당한 제너렬셔먼호에 대한 보상을 구실로 신미양요(1871년)를 일으켰다.
그리고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의 선원들이 수심측량을 핑계로 초지진에 상륙을 시도하다가 조선군의 반격으로 좌절되자 함포 공격을 시도했고 퇴각하면서 영종진을 공걱해 초토화시켰다. 이 사건을 빌미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했고, 이로 인해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문호를 개방한다.
강화도조약(1876년)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일본에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대한제국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을 겪으면서 해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열강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근대식 군함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근대식 함선인 양무호와 광제호를 도입했는데, 양무호는 일본 정부가 화물선을 군함으로 속여서 판매한 것으로 인천항에 정박하는 날이 더 많았다.
이 태극기는 광제호에 게양되었던 것으로 신순성 함장이 경술국치 전날 거둬들인 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후세에게 전해오고 있다.
경인철도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다. 개통 당시 정거장은 인천, 축현(지금 동인천), 우각동, 부평, 소사, 오류동, 노량진 등 7개 역이었고, 열차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 왕복 운행했다. 이듬해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용산, 남대문, 경성역이 추가됐다.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에서 서울까지 12시간 가까이 소요되던 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됐다.
청일전쟁은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인천은 일본군의 상륙 거점이자 물자 보급기지로 활용됐다.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보했다.
전쟁 후 거액의 전후 배상금을 바탕으로 급속히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일본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인천 개항장의 상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경제 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러일전쟁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이후 랴오양 전투, 무단 전투, 쓰시마 해전 등에서 승전국이 되면서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고, 이 조약을 계기로 우리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세창양행은 독일계 무역회사 마이어상사의 인천지점으로 각종 기기와 약품, 생활필수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그중 가장 인기있던 제품은 바늘이었다.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수입, 판매된 금계랍은 키니네를 염산과 화합시켜 만든 해열진통제이다. 원래 말라리아 특효약이었으나, 개화기 조선에서는 학질, 장질부사 등에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제물포에 공사관 직원을 파견하는 등 조계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부두에서 가깝고 매립이 가능한 해안지대 약 7천 평을 조계지로 정하고 도로와 영사관을 구획했다. 일본조계에는 우편국, 경찰서 등 관공서와 일본 상인을 지원하기 위한 은행, 사찰, 학교 등도 들어섰다. 일본 상사는 자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교통망과 금융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조선 경제 침탈을 자행했다.
청국 조계는 일본 조계 서쪽 약 5천 평의 땅으로, 영사관과 순포청을 설치하고 자국민의 권리와 상인의 무역행위를 보호했다. 개항 이후 인천에 들어온 중국인은 대부분 산둥 지방 출신으로 쿨리(부두노동자), 화상(무역과 상업 종사자), 화농(농민)으로 구분된다.
완용펌프는 소방차의 원조로, 개항 이후 도입되어 본격적인 소방제도가 정비되던 광복 이후까지 쓰였다. 팔의 힘을 이용해 화재 진압에 필요한 물을 끌어올린다는 의미에서 완용 펌프라 불렀으며, 펌프를 수레에 실은 후 화재현장까지 이동시켰다. 이 완용펌프는 1990년대까지 인천 서구 연희동 의용소방대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지방 행정제도 개혁에 따라 인천부는 개항장 일대를 중심으로 축소됐고, 그 나머지 지역과 부평군이 통합되어 부천군이 신설됐다. 교동군은 강화군으로 통합됐다.
일제는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관광을 이용했다. 한일합병 5주년을 기념해 인천수족관을 개관했고, 월미도 개발을 시작한 이듬해 해수욕장을 만들었다. 월미도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석축 제방을 쌓았고, 월미도 북단에 조탕과 풀장 등을 갖춘 월미도 유원지를 건설했다.
중일전쟁 이후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본토에서 충당하기 어려워지자,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 수탈이 더욱 심화됐다. 일제는 중국에서 가깝고 항만, 철도 등의 교통과 산업시설을 갖추고 있던 인천을 군수기지로 만들기 위해 군수공업 단지를 조성해갔다. 개항 후 상업도시로서의 성격을 유지해왔던 인천은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공업도시로 변모해갔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인천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한국전쟁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대부분의 공장과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됐다. 1960년대 들어 인천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벗어나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1968년 구제를 실시해 중구, 동구, 남구, 북구가 설치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고속도로가 건설됐고, 수도권 전철이 개통됐으며, 매립을 통해 인천항을 내항으로 만드는 건설 공사도 완료됐다. 특히,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동양 최대의 갑문을 건설해 5만 톤급에 달하는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해졌다.
그때 일본조계지는 개항장거리로, 청국조계지는 차이나타운이 됐다. 지금은 이국적인 분위기로 인천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지만,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박물관은 어디로 갈까나? 행복한 고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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