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길상사 2024 꽃무릇 (feat. 점심공양)
봄은 매화와 벚꽃, 여름은 수국과 능소화, 가을은 코스모스와 꽃무릇 등 계절을 알리는 꽃이 있다. 예전에는 때가 되면 이 꽃들을 만나러 거짓말을 많이 보태서 전국을 다녔다. 그때는 열정에 체력도 좋았는데, 지금은 열정은 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못한다. 그래서 많이 내려놨는데 꽃무릇만은 예외다. 가을이구나 싶으며 어김없이 '길상사 꽃무릇'으로 검색해, 개화상황을 체크한다. 대체로 추석이 오기 전에 개화를 하는데, 올해는 더위 때문인지 이제야 꽃이 폈다. 업로드 기준으로 어제(9월 24일) 방문했다.
길상사 꽃무릇은 두 곳의 군락지가 있다. 하나는 극락전 주변과 법정스님이 계신 진영각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다른 곳에서도 꽃무릇을 만날 수 있지만, 군락지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암튼, 첫 번째 군락지에 도착했다. 초록만이 가득한 곳에 빨간 무리는 눈에 확 띈다.
꽃무릇 상태를 보아하니, 지난 주말 무렵이 절정인 듯싶다. 꽃은 만개를 했는데, 해가 지듯 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더 좋다. 왜냐하면, 엄청난 카메라 장비를 동반한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깐. 예전에는 나도 그들과 비슷했는데, 요즈음 그냥 가벼운 하이엔드 똑딱이로 찍고 있다.
지장전 근처에 있는 연못을 담고 진영각으로 가려고 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왜라는 궁금증은 잠깐, 바로 눈치를 챘다. 점심공양을 기다리는 줄이다. 20번까지는 아니더라도 10번 이상은 왔는데, 한 번도 점심공양 시간을 맞춘 적이 없다. 12시가 되려면 15분 정도 남았지만, 이왕 왔으니 먹어야겠다.
점심공양은 12시부터 12시 50분까지다. 처음이라서 같은 메뉴가 나오는지 모르지만, 이날은 비빔밥이 나왔다. 3가지 나물이 들어 있는 밥그릇은 따로 비치되어 있어 하나를 선택한 후, 밥은 따로 담아주고, 고추장은 셀프로 퍼담으면 된다. 공간도 넓고 사람도 많은데 안은 고요하다.
사실, 묵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꽤 소란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해졌는데, 스님 한 분이 다니면서 묵언을 강조하고 계셨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있으면 조용, 없으면 소란, 밥을 먹다가 피식했다.
따로 밥값을 받지 않지만, 보시함이 있다. 내도 되고, 안내도 되고, 금액이 따로 정해재 있지 않으니 알아서 적당히 넣으면 된다. 그리고 공양이 끝나면, 빈그릇은 자율개수대에서 직접 설거지를 해야 한다.
수박과 당근튀김은 길상사에서 제사에 사용한 음식으로 알고 있다. 기다리면 보니, 앞줄에 있던 분들은 자몽이 나왔다. 맛을 논할 곳이 아니므로 맛평가는 없다. 대신 수박 씨와 껍질을 제외하고 밥 한 톨, 미역 한 줄기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절에 다녔기에, 절밥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깨끗하게 설거지까지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길상사 꽃무릇 두 번째 군락지를 만나러 법정스님이 잠들어 계신 진영각으로 향한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있다. 길상사가 예전에 요정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대원각 여주인 김여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을 받아, 자신의 모든 재산인 대원각을 무주상보시의 정신으로 시주를 했다. 1987년 대원각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 모두를 시주했는데, 그 당시 1,000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후, 유골을 길상헌 뒤쪽에 뿌렸고, 이를 기념해 그 자리에 공덕비를 세웠다.
꽃무릇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꽃이 져야 잎이 나기 때문이다. 즉, 잎과 꽃은 함께 할 수 없다. 그나저나 매번 꽃만 보고 가서, 잎을 본 적이 없다.
사찰에 꽃무릇이 많은 데에는 알뿌리에 있는 방부제 효능때문이다. 경전을 묶거나 단청이나 탱화를 그릴 때 즙을 내 풀에 썩어 바르면 좀이 슬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예로부터 일부러 심었다고 한다.
원체 나무가 많다 보니, 양산이 없어도 될 정도로 커다란 그늘이 있다. 그리고 나뭇가지 틈으로 내리쬐는 강한 햇살은 핀조명이 되어 꽃무릇을 더 빛나게 만들어 준다.
오후 1시가 넘었는데, 마치 이른 아침 같다. 왜 조명이 중요한지, 확실히 알겠다. 부제: 빛나는 꽃무릇
극락전 부근 첫 번째 군락지와 달리 여기는 꽤나 허전하다. 그래도 햇살이 만든 조명발은 여기가 더 끝내준다.
진영각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법정스님이 잠들어 계신 곳이 나오고, 전각 끝에 다다르면 법정스님이 앉았던 나무 의자가 놓여있다. 참, 진영각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가을이 오면, 무지 심하게 가을을 탄다. 요즘 눈물도 많아졌는데, 이번 가을은 울컥할 일이 많을 듯싶다. 여름에는 항상 손수건을 들고 다녔는데, 올 가을도 변함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꽃무릇의 꽃말이 올해는 더 슬프게 와닿는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니깐.
2023.09.22-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길상사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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