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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의 역사 | 서울외식이야기 (in 서울생활사박물관)

외식의 사전적 의미는 '집에서 직접 해 먹지 아니하고 밖에서 음식을 사 먹음'이라고 한다. 우리 집에서 외식은 특별한 날이었다. 집밥을 좋아하는 호적상 큰 어르신으로 인해 외식은 먼 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부지가 들고 오는 통닭 한 마리에 행복했으며, 어쩌다 먹는 돼지갈비는 천상의 맛이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외식 이야기이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174길 27에 있어요~

서울생활사박물관은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서울 시민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근현대 박물관이다. 3년 전에 방문을 했기에, 상설전시관(하단 링크 참조)은 제외 바로 4층에 있는 기획전시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밖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식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가족과 나누는 따뜻한 시간, 그리고 나만의 취향을 즐기는 것이 됐다. 서울의 명물 설렁탕집부터 영원한 인기 외식 장소 중국집, 가족 외식의 상징이 된 갈비구이집 등 서울 외식 이야기를 통해 외식의 역사를 만난다.


1. 채우는 식탁

1950년대부터 1970년 중반까지.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서울은 한강 이북(강북) 중심의 도시였다. 서울사람들 대부분은 화이트칼라로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와 블루칼라로 불리는 생산직 노동자였으며, 봉급에 의존해 가족을 위해 생계를 꾸려가는 샐러리맨이었다. 

이들은 직장에서 점심을 사먹었고, 퇴근길에 술집에서 저녁 식사나 술과 안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 시기 서울의 대표적인 끼니형 음식점 메뉴는 설렁탕(이문설농탕), 해장국(청진옥), 곰탕(하동관), 추어탕(용금옥) 등이었다.

 

청진냉면옥 광고 전단지(1932), 한일관 영수증(1959), 왕면 식당 개업 홍보지(1970)
1955년 대한안내사에서 발행한 상계약도
청량리 버스 정류장(1966)
새서울 버스길 약도 (1969)
1970년대, 1955년, 1961년 월급봉투
대폿집 명월옥의 외상장부 (1950~60년대)

1970년대까지 서울 사람들의 주된 외식 유형은 끼니형 음식점이었다.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시간 노동과 근검 절약의 생활을 이어갔고, 이들의 허전한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던 음식이 바로 국밥이었다. 

 

이문설농탕

이문설농탕은 현존하는 설렁탕집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개업시기는 1902년, 1904년, 1917년으로 의견이 분분한다. 메뉴는 식사류와 안주류로 구분되는데, 식사는 설농탕과 도가니탕, 머리탕으로 단순하다.

이에 반해 안주는 수육, 도가니안주, 소머리안주, 혀밑 그리고 마나(소 비장)가 있다. 손질이 어려워서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혀밑과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설렁탕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먹고 싶다.)

 

별건곤은 1926년 개벽사에서 취미와 가벼운 읽을거리를 위해 창간한 대중잡지이다. 제4권 제6호에 경성명물집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경성의 명물 음식으로 설렁탕을 제일 먼저 다뤘다.

집에 갈 노잣돈이나 자기 마누라의 치마감 사줄 돈이라도 있으며 설렁탕을 사먹지 않고선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대문 밖의 박잠배설렁탕과 종로 이문 안의 설렁탕, 장교설넝탕, 일삼옥설넝탕을 꼽을 수 있다. (경성명물집 중에서)

 

하동관
50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후덜덜~
솥에는 진짜 고기가 아니라 고기 삶는 영상~
고기를 썰던 칼과 놋그릇과 놋숟가락, 식권도장 / 1950년대 사용한 등받이가 없는 의자

하동관은 1939년 중구 삼각동 골목에 문을 열었다. 옛 하동관은 삼각동과 수하동이 마주한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하동관의 이름은 수하동의 하동에서 온 것이다. 

고기를 삶을 때는 큰 무쇠솥 2개에 고기를 나누어 넣고 2시간 넘게 푹 곤다. 고기를 삶는 동안 자주 저어주며, 얇은 것은 먼저 꺼내고 두꺼운 것은 나중에 꺼낸다. 재료가 다 익으면 고기는 너붓너붓하게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내장은 비스듬히 포를 뜬다. 이를 내포라고 하는데, 내장을 포로 떴다는 의미이다. (내장이 많아서 가고 싶어도 못가는 1인)

 

신락원
신락원의 2대 왕수신의 요리 레시피 책자

신락원은 1965년 동대문구 전농동의 같은 자리에서 3대째 이어오는 화교의 중국 음식점이다. 고향이 산동성인 왕세안은 1945년 한국으로 이주해 1965년에 안락장이라는 중국음식점을 창업했고, 그의 아들 왕수신이 1980년 안락장을 맡으면서 신락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철가방 배달통, 금성전화기,

국밥에서 중국집과 분식집으로 외식의 변화는 쌀 부족 해결을 위한 절미운동과 혼분식장려운동 때문이다. 강력한 행정력의 동원으로 서울에 분식점이 크게 늘어났고, 서울의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우동, 울면, 짬뽕과 같은 국수를 많이 판매하게 되었다.

 

철길떡볶이

당시 기성세대들은 혼분식장려운동의 일환으로 식사를 분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전 세대보다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주변에는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 등을 파는 분식점이 늘어났다. 

짜장면은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물가 안정 정책의 대상이었지만,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입학식, 졸업식에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쌀부족과 혼분식장려운동의 역사
쌀 소비 절약에 관한 담화문 / 계몽포스터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면인 삼양라면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에 직면한 정부는 미국의 대규모 식량 원조와 함께 혼분식장려운동을 펼쳤다. 쌀 절약과 밀을 통한 식생활 개선 정책을 펼친 정부는 밥만 쌀로 짓게 하고 막걸리, 청주, 소주, 떡볶이 등을 미국산 밀가루나 외국산 곡물로 만들도록 강제했다. 1980년대 이후에 쌀 생산의 증대와 혼분식이 대중화되면서 절미운동은 사라졌다.


2. 나누는 식탁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가든형 갈빗집

1970넌대 후반, 강남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이 되면 강남의 아파트 값이 폭등해 신흥 중산층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말이 되면 자가용으로 함께 외출해 전원에서 식사를 즐기는 단란한 가족의 이미지는 현대적 외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대형 갈빗집은 경제 능력과 특유의 생활양식을 갖춘 중산층 가정의 외식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생일이나 어린이날, 결혼기념일, 졸업식 등 특정한 날에 가족의 특별행사로 인식되기 시작한 외식에서 선호하는 메뉴는 단연코 고기 음식이었다.

 

스팀 다목적 불고기판 광고 전단 / 영등포 영양센터 광고 전단
불고기집 광고가 수록된 선데이 서울 제391호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육류 소비가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진 데다, 고속도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식재료 유통이 원활해지고 국내 식품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불고기는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 중 하나로, 달짝지근한 간장 육수, 얇게 저민 쇠고기와 채소를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진고개
영상이라 눈으로만 먹어요~

진고개는 1963년 개업 이후 같은 자리를 지키며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 때부터 육수를 넣고 끓이는 형태의 불고기를 선보였다. 예전에는 숯불 위에 얹은 황동 불판 위에서 불고기를 요리했는데, 이후 숯불 대신 가스불을 쓰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주물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월간 나그네 창간호(1984)
현대자동차 스텔라 광고지(1980년대) / 월간 내차 창간호(1984)

경제가 성장하며 호황을 누리자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 이왕이면 분위기 있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특히, 1980년대 마이카 시대가 대두되면서 자가용을 보유한 서울사람들에게 외식은 가족들의 여행과 놀이가 되었다. 1990년대에는 더 이상 가족 외식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부터 직장인, 가족 동반으로 외식의 소비층이 확대됐다.


3. 즐기는 식탁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

지하철 2호선과 음식 문화 거리

1984년 지하철 2호선의 완공은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부도심권을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왕십리 곱창골목과 신림동순대타운은 노동자, 대학생처럼 가난한 서민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지하철 2호선을 통해 강남 식객들이 찾아오게 됐다. 

건대 양꼬치 거리는 서울의 세계화 과정에서 생겨난 중국음식점 집중 지역이다. 직장인과 관광객이 공존하는 구역인 삼성동 코엑스 근처 삼성동 음식문화 특화거리는 서울시의 다른 먹자골목과 다르게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역생활잡지 상가로 봄호(1980)

1970년대 후반부터 여의도에 새로운 업무지구가 조성되면서 직장인 대상 외식업소가 밀집한 상가 건물, 이른바 먹자 빌딩이 생겨났다. 여의도 먹자 빌딩으로 알려진 여의도 종합상가가 대표적이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유무형의 자산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이중 음식점은 50개이다. 

 

진아춘, 한일관, 우래옥, 안동장, 마포옥, 평래옥, 오장동 흥남집, 왕십리 대도식당, 미진, 열차집, 마포진짜원조최대포, 원조 할머니 기름떡볶이, 부민옥, 오장동 함흥냉면, 고려삼계탕, 유림면, 역전회관, 창성옥, 대문점, 무교동 북어국집, 성북동 국시집, 쌍다리식당, 명동교자 본점, 원대구탕까지 24곳을 갔다.

국밥류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다 가볼 수는 없지만, 소라분식을 시작으로 다시 순례를 시작해볼까 한다. 참, 즐기는 식탁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요즘 외식은 다수에서 혼자로, 혼자에서 다수로 인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지금은 혼밥이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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