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고 그 한글을 계속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말과 글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말은 변함이 없지만, 글은 한자를 사용했을 것 같다. 즉, '우리'라고 말을 하고 '于里'라고 글을 쓴다. 요즘 영어에 제2외국어까지 해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한글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한글날 즈음에 가려고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제서야 다녀왔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프랑스 샹폴리옹세계문자박물관, 중국문자박물관과 같이 세계의 다양한 문자를 주제로 하는 문자 박물관이다. 만약 한글이 없었더라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글박물관은 뿌듯한 감동이었다면,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위대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문자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한글(1443년~현재)과 한자(기원전 14세기경~현재)처럼 지금도 쓰이는 문자가 있지만, 인더스문자(기원전 2400~기원전2000년)와 만주문자(1599년~20세기 초반)처럼 사라진 문자도 있기 때문이다.
말과 소리만 있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과 생각 등을 바위나 동굴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동굴벽화와 암각화는 인류가 남긴 최초이 기록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쇼베퐁다르크 동굴벽화, 라스코 동굴벽화, 알타미라 동굴벽화 그리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각석 등이 있다.
1부: 문자, 길을 열다
문자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이 발명품을 기반으로 인류는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길을 열었다. 문화의 흥망성쇠와 함께 문자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사용한 문자는 사백여 종이지만, 현재까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는 삼십여 종에 불과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리 한글이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쐐기문자는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로,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명됐다. 이들은 강가의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갈대를 사용해 문자를 기록했다. 쐐기문자는 갈대로 그린 선이 쐐기모양으로 보이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집트문자는 신성하게 새겨진 문자라는 의미로 성각문자로 불린다. 성각문자는 주로 신전이나 왕묘의 벽면 등에 새겨졌는데, 피라미드 내부에 새겨진 피라미드 텍스트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집트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를 거쳐 유럽,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현재 사용되는 대다수의 문자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이집트문자를 문자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마야문자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메소아메리카지역에서 사용되던 문자이다. 5세기~10세기 사이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고, 16세기경 문명과 함께 사라졌다.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문자로, 신에게 기도하고 신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고자 했던 마야인들의 삶과 세계관이 담겨있다.
라틴문자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로마인들이 라틴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자이다. 그리스문자와 마찬가지로 한 개의 문자가 한 개의 음을 표시하는 알파벳 체계이다. 라탄문자는 기독교의 전파와 학술문자 그리고 해외 진출과 식민지 건설로 인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문자이다.
아람문자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공용문자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기원전 6세기 경에 페르시아제국이 아람어를 국제 공용어로 선포함에 따라, 아람문자도 공식 문자가 되어 고대 근동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레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제국을 무너뜨리자, 아람문자는 페르시아제국과 함께 그리스문자에게 지위를 내주고 서서히 소멸의 길을 걸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은 고대부터 다양한 문명의 교차로로서 여러 종족과 문화가 공존했다. 이 지역은 인도 문명을 바탕으로 아랍, 중국,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다양한 문자를 사용했다. 인더스문자가 이 지역 최초의 문자이다.
한자는 3,3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오랜 역사를 지닌 문자이다. 글자 수가 수만 자 이상에 이르는 대표적인 표의문자이다. 한자의 형태는 발생시기, 기록하는 매체, 구조적 특징에 따라 수천 년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한자는 오래전부터 북망 유목민족을 포함,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주변 지역에 전파되어 거대한 문자 문화권을 형성했다.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도 한자를...
한글은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를 알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다. 세종대왕은 이 문자를 훈민정음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뜻이다. 한글이 없던 시절, 중국의 한자를 그대로 쓰거나,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서 만든 이두, 구결, 향찰로 우리말을 기록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불편했다. 세종대왕은 이를 무척 안타깝게 여겨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 하지만 국가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하다, 1894년 고종의 칙령으로 한글을 공식 문서에 쓰면서 한글은 국가가 인정한 국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선교사 로제타 홀이 전파한 4점식 점자는 우리말과 글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이 시행됐지만, 일본 점자 역시 우리말과 달랐으며 조선총독부의 근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명목상의 교육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각장애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제생원 맹아부 교사 박두성은 한글점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26년 예순 세자의 배우기 쉬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었다.
2부: 문자, 문화를 만들다
문자는 낡은 시대를 저물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는 위대한 힘을 보여줬다. 인류는 문자를 사용해서 소통 방식에 혁명을 가져왔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끊임없이 개혁했다. 가장 눈부신 인류의 소통 혁명은 인쇄술에 기반한 문자 대중화에서 비롯되었다. 인쇄술은 인류 지식의 대중화를, 번역은 인류 지식의 확산과 공유를, 기록은 인류 지식의 전승을 이끌었다.
처음 만들어진 문자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들은 정치와 종교와 지식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활용했다. 인쇄술은 문자를 종이 등에 담아서 다량으로 복제하는 기술로, 다수의 사람이 손쉽게 문자를 접할 수 있었다. 소수가 누리던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전수됐고, 지식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인쇄술은 중세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촉매가 됐다.
번역은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의 의사소통으로, 인류는 번역으로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여러 문화적 성취물을 공유했다. 번역을 통해서 종교와 사상은 주변으로 확산했고, 동서양의 문학, 과학, 의학 등은 지역의 한계를 넘어 새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기록이란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 혹은 단체에서 문서를 생산하는 행위와 그 생산물을 뜻한다. 말이 아닌, 문자로 기록됨으로써 인류가 체득한 지혜는 보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오래도록 보존하며, 후대에 전승될 수 있었다. 과거의 흔적들은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승되었고, 기록의 축적으로 인류 문명은 진보했다.
매체는 문자를 기록하기 위한 물체나 그 수단을 가리킨다. 인류가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했던 주요한 재료로는 진흙, 돌, 금속, 뼈, 식물, 나무, 가죽 등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된 재료는 식물을 활용해서 만든 종이이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지식의 양은 책의 두께가 아니라 데이터의 용량으로 좌우될 것이다.
문자를 기록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예술성을 획득한 근본적인 원인은 형태와 표현의 다양성이다. 서체는 서사 도구의 변화와 함께 서사자가 빠르고 편리하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형태가 진화했다. 각 문자마다 고유의 멋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문자가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물이고, 시간이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내일의 문자
정보 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문자를 통한 지식의 공유 방법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쇄술은 종이에 기반한 책, 책에 기반한 문자 체계였다면, 디지털 매체는 영상, 음성, 이모티콘 등으로 문자의 영역을 넓혔다. 그림에서 문자로 향했던 인류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는 역사의 역설, 새로운 그림 문자의 탄생이다.
인종, 지역, 역사에서 비롯된 세계의 언어와 문자 장벽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무한대의 지식을 습득한 인공지능 기반의 통번역 기술이 인류를 하나의 울타리로 감싸고 있다. 만약에 모든 인류가 사용하는 세계 문자가 생긴다면, 그 시작은 이모티콘이지 않을까? 외국어 교육도 번역기도 필요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으니깐.
자장면에서 짜장면은 반갑지만, 그 자체를 그 잡채로, 아아아를 ㅏㅏㅏ로 바꾸는 한글 파괴는 그만~ 언어유희를 모르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보는 방송 자막에서 그 잡채를 보고 싶지 않다. 두번보다는 한번이 당연히 빠르겠지만, 그래도 앞에 자음 'ㅇ' 넣어서 아아아로 해줬으면 좋겠다. 한글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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