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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 다산 정약용 유적지 옆 실학박물관

서울에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히니 가고 싶은 박물관이 자꾸만 나타난다. 정약용 유적지에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인물이 아닌 그의 사상이 담은 박물관이 있다. 그곳은 실학박물관, 박물관 덕후로서 아니 갈 수 없다. 박물관에서 유적지까지 알차게 계획을 세웠건만, 설마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학박물관에 가려면, 정약용 생가와 묘소가 있는 유적지를 지나쳐야 한다. 자주 올 수 없기에 두루두루 다 보려고 했는데, 12월 4일까지 임시휴관을 한단다. 이럴 때, 가는 날이 장날이다라고 말한다. 꽃피는 봄에 다시 오라는 의미로 간주하고, 이번에는 실학박물관만 둘러봤다.

 

실제 크기 아니고 축소 규모로 제작

거중기를 모르는 사람을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거중기는 1792년(정조 16)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수원화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건설 경비를 4만 냥이나 절약했으며,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실학박물관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6에 있어요~

실학박물관은 1층에 기획전시실이 있고, 2층에 상설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는 실학의 형성, 실학의 전개 그리고 천문과 지리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당일은 휴관이다.


제1관 실학의 형성

조선후기의 변화와 개혁은 기존의 학풍에서 벗어나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학문적으로 제시했다. 학문의 대상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현실문제로 옮겨졌고, 여기서 실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치사회의 변화 (영조와 정조 어진)

지봉유설은 이수광이 편찬한 일종의 문화백과사전으로 인용된 서적이 348종이며 3,435 항목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분류하고 체계화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물에 대한 선진적인 지식을 수록했으며, 실용과 실리를 추구하며 민본을 강조한 그의 학문태도는 관념에 젖어 있던 조선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십전통보, 상평통보, 균역청사목

실학자들은 민부를 바탕으로 국부를 증진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산업을 증진시키는 한편, 백성으로부터 부세를 거둬들이는 제도를 합리적으로 해야 했다.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대동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은 많이 줄어들면서도 정부의 조세 수입은 크게 증가했다. 

 

조선 후기에 사용된 수표와 어음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하는 사회였지만, 일부 실학자들은 상업이 산업에 끼치는 순기능을 주목했다. 또한 상업 활동을 국가재정을 위한 세원으로 파악해 관심을 가졌다.

 

실학의 탄생
이이명 초상 / 허균이 지은 한정록
박세당 초상과 그가 지은 색경

실학자들은 관념적 명분론을 반성하면서, 오랜 폐단을 없앨 제도 개혁과 실질적 민생을 위한 대책들이 만들었다. 유형원은 토지제도를 비롯해 전반적인 국가제도 개혁론을 펼쳤고, 박세당은 농사체험을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 색경을 썼다.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탁본은 유형원의 묘비)
유형원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지리서 '동국여지지'

반계선생전은 성호 이익이 지은 반계 유형원 선생의 전기이다. 유형원의 학문과 개혁 의식은 이익에게 전수되어 실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연행사와 통신사

직공도는 숙종 때 도화서 화원인 진재해가 청나라의 그림을 보고 중국에 온 여러 나라 사람들은 그린 것이다. 당시 중국에 온 안남국(월남)사신, 서양 신부와 수녀, 서양인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제2관 실학의 전개

실학은 18세기 전반기의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학문이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과 후반기의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상공업 진흥과 기술개발을 통해 백성의 살림살이를 넉넉하게 하는 이용후생으로 두 흐름이 있으며, 다산 정약용은 이를 집대성이 시켰다. 더불어 19세기 전반기의 추사 김정희는 실사구시설을 통해 학문적으로 사실에 근거하는 실증주의를 강조했다. 

 

중농학파: 경세치용파
이익과 안정복의 초상화

경세치용은 세상을 경영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문으로, 성호 이익은 토지 균분, 인재양성과 관료 선발의 개선 등을 주장했고 누구나 생산노동에 종사할 것과 근면하고 절검 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학문은 유형원, 안정복 등 많은 제자가 따랐는데, 이들을 성호학파, 경세치용파 또는 근기학파라고 부른다. 

 

이용후생파 중상학파
박제가의 초상화
박지원의 초상화와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백성의 생활이 편리하고 삶이 넉넉해야 비로소 도덕도 바로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용후생론으로 정덕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이용과 후생을 먼저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상공업과 해외통상을 발전시키고 외국의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연암의 벗 사상가 홍대용은 음악, 수학, 천문에 조예가 깊었다.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태어나 정조 때 관료로 활약했으나 1800년 정조 사후 유배되었다.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학문에 힘써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경학은 육경 사서 등의 유교 경전 연구로 상서고훈, 주역사전, 논어고금주 등이 있다. 경세학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연구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1표 2서가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
여유당전서는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정약용의 문집

하피첩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재단해 만든 친필 서첩이다. 노을빛 치마를 뜻하는 하피는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색 바랜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피첩에는 가족 간의 유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삶의 태도 등 두 아들과 후손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는 아직 돌아오지 못해서 비워두었다.

 

실사구시파
김정희의 초상화와 소봉래 난

실사구시란,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학문 정신이다. 19세기 전반 김정희가 중국의 고증학자들과 교유하는 고정에서 성립됐는데, 그 정신은 이미 실학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었다.

 

근대로의 가교
최한기가 그린 인체 해부도

최한기는 실리와 변통을 강조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를 하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동양의 기 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수용했다.

 

박규수의 초상화

박규수는 대동강에 침입해 횡포를 부린 제너럴 셔면호를 화공으로 격퇴시키는 활약을 했지만, 대원군에게 개항하도록 설득했던 자주적 개항론자였다. 또한 동양 문화의 우월감 아래 서양과 적극적으로 교섭하고자 했다. 

 

천연두를 앓고 난 후, 눈썹이 셋이 됐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정조의 죽음 이후 유배에 처해졌다. 유배 18년 동안 낡은 국가를 새롭게 하기 위한 개혁안으로 경세유표를, 수령이 행정을 잘해 백성이 혜택을 누리도록 목민심서를 저술했다. 그는 성호학파를 계승하는 한편, 연암그룹의 이용후생폰을 수용해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린다. 


제3관 실학과 과학

16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서양의 학문과 문물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은 크게 발전했다.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나라를 독자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실감콘텐츠 체험실로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한강 영상

중앙에 있는 혼천시계는 태양의 위치와 계절, 날짜를 알려주는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던 기구인 혼천의와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적인 시계를 결합한 천문시계이다. 그 뒤로 보이는 지도는 신곤여만국전도로 1708년 조선왕실에서 제작한 회화식 세계지도이다. 

 

실학자 유금이 제작한 서양식의 천문기기 '혼개통헌의'
혼천의는 해와 달과 오행성의 위치를 알아보는데 사용한 천체관측기기

앙부일구는 1434년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이다.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솥이 하늘로 향해 있다고 해서 앙부일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물관이라 쓰고 교육관이라 읽어야 할 듯 싶다. 실학은 역사 시간에서 배웠으니 그리 어렵지 않겠구나 했는데, 등장하는 인물이 너무 많다. 반을 알았고, 반은 이번에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나? 실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볼거리가 무지무지 많은데 다 소개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고로,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실학박물관은 무조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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