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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사박물관 구 북부법조단지에서 박물관으로

레트로 갬성이 아니다. 여기는 진짜 찐~ 레트로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그땐 그랬지를 생각나게 하는 서울에 사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 "당신의 하루가 서울의 역사가 된다" 공릉동에 있는 서울생활사박물관이다.

 

구 북부법조단지가 도시재생을 통해 서울생활사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생황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서울시민들의 일상 생활사를 결혼, 출산, 교육, 주택, 생업 등의 주제로 그 당시 추억을 회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요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응답하라 시리즈가 떠오를 거 같고, 아날로그를 경험한 세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격동의 70, 80년을 보낸 분들은 그땐 그랬지를 달고 관람을 할 듯 싶다. 서울생활사로 한정되어 있지만, 서울 출신이 아니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며,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1층 전시관 "서울풍경, 서울에 살다"
포니원 택시(좌) / 브리사(우)

포니원 택시는 1975년에 개발된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다. 이듬해부터 판매가 시작되어 같은 해 우리나라 승용차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0,726대(43.5% 점유율)가 판매됐다고 한다. 브리사는 1974년 10월에 출시된 기아자동차 최초의 승용차 모델이다. 일본의 마쓰다 패밀리아를 기본으로 디자인되었지만, 부품의 90%는 국산이었다고 한다. 

 

1960~80년대 서울 도시의 기억
1960년대 도로풍경 / 1970년대 초 광화문과 중앙청
사진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우리 집도 저랬는데~

서울이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불량주택들이 철거되고 고층 업무용 빌딩이나 단지형 아파트가 건설됐다. 여의도와 강남, 잠실이 대규모로 개발되었고,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도 속속 건설되었다. 1970년 서울 인구는 500만을 돌파했고, 1978년에는 800만을 넘어섰다. 

 

빈병을 보는데 울컥~

지금도 라면 먹지 말고 밥 먹으라는 잔소리를 듣고 있지만, 라면의 탄생은 혁명이라 생각한다. 밥은 할 줄 몰라도 라면은 끓일 줄 아니깐. 양은냄비에 적당량을 물을 넣고 끓기만을 기다린다. 면과 스프를 넣고 또 몇분을 기다리다 보면, 과자처럼 딱딱했던 라면은 어느새 국수처럼 맛좋은 라면이 되어 있다. 반찬은 그저 잘 익은 김치 하나면 끝, 찬밥이 있다면 완벽하다.

 

아날로그 시절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겪어 온 1인이기에, 삐삐부터 PSC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다 사용해 봤다. 시티폰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삐삐가 오면 공중전화로 달려가야 하니 전화카드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다 011, 016, 017, 018, 019로 손전화기 시대가 왔다. 한동안 018를 써오다, 2000년를 맞이하면서 011로 변호를 변경했다. 그리고 2011년쯤 아이폰4를 시작으로 5, 6를 지나 현재는 7을 쓰고 있다. 예전에 쓰던 삐삐를 여전히 갖고 있는데, 버리지 말고 계속 보관을 해야겠다. 

 

2층 전시관, "서울살이, 기회의 땅 서울"

제 2전시관은 서울에서 살아 온 서울 사람들에 대한 전시공간이다.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 서울에서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며 살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를 서울토박이라 했는데, 토박이는 1910년 이전부터 한성부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지금껏 살고 있지만, 부모님 고향이 서울이 아니니 토박이가 아니라 그냥 서울사람이다. 

 

조용필 13집,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등 버튼이 설치되어 있어, 노래를 바로 들을 수 있다. 더불어 그 옆에 있는 바람불어 좋은날, 영자의 전성시대 역시 버튼을 누르면 영화 장면이 나온다. 로보트 태권V,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 고교 얄개, 미워도 다시한번 그리고 인디아나존스까지 신기하게도 다 기억이 난다. 

 

서울가족 탄생하다, 결혼
1960~70년대 혼수목록 1호는 재봉틀
1975년 결혼 예물은 시계, 혼수는 전기밥솥과 토스터기

신식결혼이 보편화됨에 따라 1937년 금구예식부, 만화당예식부 등 전문 예식장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식장이 대중화가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신부집 앞마당은 존재하기 어려웠고, 피란민 등 마땅한 장소가 없는 사람들에게 예식장은 매력적인 장소였다. 당시 예식장에서는 면사포와 신랑 연미복 등을 빌려주었고, 근사한 결혼식 사진도 남길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시대별로 혼수품을 보면, 1950년대에는 옷감, 이불, 바느질 도구, 요강, 반상기. 1960~70년대에는 한복, 다리미, 재봉틀 그리고 자개농과 다이아몬드같은 사치품도 포함. 1980~90년대 입식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침대와 소파 등 가구류와 컬러TV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과 주방용품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서울내기 나고 자라다, 출산 육아
어릴때 갖고놀던 장난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지금과 달리 다산이 미덕이던 1955~62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800만 명에 이르고 현재 인구의 약 14%를 차지한다고 한다. 1946년 해방 이후 첫 어린이날에 서울시 주최의 우량아 선발대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공식명칭은 어린이건강심사회로 1968년까지 서울시에서 개최했고, 수상자의 별칭은 베이비 서울이었다고 한다.

 

1971년부터 열린 전국우량아선발대회로 문화방송이 주관하고 남양유업이 후원하는 가장 유명한 대회였다. 연 2만여 명이 참여했으며, 대회는 방송으로 중계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빈곤한 시절 우량아의 모습은 부모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단다. 우량아선발대회는 1984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3층 전시관, "서울의 꿈"
연탄 아궁이와 입식 개수대
가스 곤로와 팔각 성냥

연탄아궁이는 시멘트 부뚜막 윗면에 연탄 화구를 만들어 음식을 조리하는 화덕을 겸하고 아래쪽에는 공기구멍을 내었다. 전통부엌 구조에 비한다면 그을음이나 연기발생 등의 문제가 현저히 개선됐지만, 높이가 낮아 일하는 자세는 여전히 구부정했다. 입식 개수대는 시멘트로 만들고 위생적으로 보이기 위해 백색타일을 붙였다. 말이 개수대이지, 196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의 수도 보급률은 절반에 불과, 대부분 수돗가의 물을 부엌까지 길어와서 썼다고 한다. 어릴때 곤로 특유의 기름냄새를 좋아하면 몸 안에 기생충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곤로 냄새를 엄청 좋아했었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로 무장한 신식 부엌 등장
우리 집에도 있었는데 누가 버렸지~

1970년 부엌에서 취사와 난방이 분리되면서 부엌 바닥은 거실 바닥과 높이가 같아졌고 두 공간의 출입도 예전처럼 신발을 신거나 문턱을 넘을 필요가 없이 편해졌다. 동시에 부엌에 식탁을 들이는 것도 유행해, 부엌 겸 식당 또는 주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 덕선이네 부엌은 곤로를 사용한 입식 개수대, 라미란 여사가 있는 정봉이네 주방에는 싱크대가 있다. 어릴때 우리집도 덕선이네 부엌이었다. 그때 싱크대가 있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엄청 부러웠다. 

 

개량 한옥의 안방
금성 흑백텔레비젼과 금성 선풍기 / 재떨이와 요강

전통주택의 안방은 여성의 공간이었으나, 근대 이후 단란한 가족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안방의 장식물은 곧 집안의 첫인상이 되었기에, 자연스레 꾸미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개농과 문갑장 등은 안방시대의 상징처럼 회자됐다고 한다. 미닫이문이 달린 흑백텔레비젼, 전화기, 라디오의 제자리는 당연히 안방이었다.

 

아파트의 거실
전화번호부를 펼쳐 장난전화 한두번쯤 안해본 사람 손?!

거실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 위주의 주택 평면개발이 추진되면서부터다. 1970~80년대 아파트 거실의 마루바닥에는 카펫을 깔기도 했고, 서구식 생활을 상징하는 입식가구를 들여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널찍하게 보이는 공간이었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로 불리기도 했다.

 

도시락 세대이긴 하나, 보온도시락을 들고 다녔다구~
양은 도시락과 어린이 수저세트 / 왕자파스, 신신파스, 밀레파스

국민학교 시절, 새교과서를 받으면 어김없이 하는 일이 있었다. 저학년때는 아부지가 해줬고, 고학년이 되면서는 스스로 했다. 두껍고 빳빳한 달력 뒷장으로 책 표지를 싼다. 그런 후 매직으로 산수, 자연 등 교과목을 앞과 측면에 적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둔다. 문방구에 가면 알록달록 이쁜 책 커버를 팔았지만, 이상하게도 달력이 좋았다.

 

학교 행사라면 단연코 소풍과 운동회 그리고 방학

소풍은 봄, 운동회는 가을, 방학은 여름과 겨울이다. 누구처럼 노는게 가장 좋았던 시절이니 교실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신이 났다. 소풍 전날의 설렘과 방학 마지막 날은 아쉬움은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좋고도 슬픈 추억이다. 부모님은 달리기를 잘했다고 하던데, 난 한번도 일등을 한 적이 없다. 고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처음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했다가, 설명문을 읽고 나서야 알게됐다. 너의 이름은? 은행알 추첨기. 중학교 배정을 위해서는 요녀석(?)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직접 추첨기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두번, 왼쪽으로 한번 돌리면 추첨기 구멍으로 은행알이 나왔고, 자신이 입학할 중학교 번호가 적혀있었다. 그래도 남이 아니라 내가 직접 돌리니 나빠도 할 말은 없었을테고, 왠지 로또보다 더 쫄깃했을 듯 싶다.

 

1982년 1월 4일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책임의식을 기르기 위해 중고등학생에 대한 두발규제와 교복을 폐지했다. 이 조치에 따라 두발은 1982년 9월부터, 교복은 1983년 신입생부터 자율화되었다고 한다.

 

요즘 입학식과 졸업식 선물은 뭘까? 그리고 여전히 식이 끝나면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까? 내년에 조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 뭘 사줘야 할지 지금부터 생각해봐야겠다. 혹시 조카도 선물보다는 현찰을 더 원할까나.

 

사진에 나온 곳중에 지금은 2억 뇌물로 더 유명한 ABC뉴욕제과는 폐점(2012년)이 되기 전까지 강남의 랜드마크였다. 왜냐하면 강남에서 누구를 만날때면, 약속장소는 늘 어김없이 뉴욕제과 앞이었기 때문이다. 

 

높다란 굴뚝에서 흰연기가 모락모락나는 동네목욕탕은 정말 동네마다 다 있었다. 아프다고 아무리 외쳤도 살이 빨개지기 전까지 이태리타월을 들고 있는 어무이 손은 멈추지 않았다. 어릴적 목욕탕에 대한 추억은 쓰라림 그리고 달콤함이다. 왜냐하면 목욕이 끝나면, 꼭 초코, 딸기, 바나나우유를 사줬기 때문이다. 서울사람으로서 나의 하루도 서울의 역사가 된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나, 당신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인생이,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 같이 보면 좋을거라 생각하는데...

2015/03/30 - 아파트 냄새 = 부자 냄새

2015/08/05 - 추억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공중전화카드!!

 

추억이 아닌데, 추억이 되어 버린 공중전화카드!!

언제부터였을까? 그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끝은 기억난다. 내 생애 첫 휴대전화인 018 pcs 폰을 구입하고 난후,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갑 속 필수품이였는데, 한순간 사라진 녀석. 네가 없으면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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