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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1970년 11월 13일, 스물 세살 청년 전태일은 세상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2019년 12월 12일 반세기가 되어 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지 못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그리던 꿈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그를 만나러 을지로에 있는 전태일기념관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종로3가역과 을지로3가역 사이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 전태일기념관이 있다. 입구에는 20세기 전태일과 21세기 장그래가 웃으며 반긴다. 그들의 웃음이 슬퍼보이는 건, 그저 내 기분탓이겠지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2019 소장품 기획전 이소선 8주기 추모전 "어머니의 꿈 하나가 되세요"를 하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가 말한 하나가 되세요는 연대의 가치를 일깨우는 외침이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하나가 되세요의 의미다. 

 

라면상자 뒷면에 유성펜으로 문구를 직접 작성한 임금인상투쟁을 위한 팻말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 받고 멸시 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루어주세요."

 

1970년 11월 13일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로 약속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의 친구들과 함께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하는 것으로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시작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담은 자료 및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 강영민의 "이소선 미러링"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꿈 전시는 3층에서 이어진다. 더불어 전태일 상설전시도 3층에 있다.

 

이음터 상설전시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어린 나이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우산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살에 본격적으로 평화시장의 봉제 노동자가 되었다. 기술의 배워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은 비참하고 끔찍했다. 특히 어린 시다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 

 

1970년 11월 13일 잊을 수 없는 그날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도 돈이 없었을텐데, 밤잠 없이 일하는 어린 시다들을 위해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명에게 골고루 나눠졌다고 한다. 덕분에 평화시장에서 도봉산까지 차비가 없어 걸어오느라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주었다고 한다.

 

다락방 = 작업장
복층으로 되어 있다.

공장은 대부분 소규모로 노동자들은 1.5m도 되지 않는 낮은 천장 때문에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고 한다. 작업장에 들어가자마자 숨이 막힌다. 여기는 그저 세트인데, 실제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 연신 재봉틀이 돌아가고, 실밥같은 먼지도 엄청 났을 것이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는 하루 기본 15시간의 장시간 노동은 물론, 밤샘 야간작업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작업장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일을 해야만 했다. 불안정한 고용환경으로 비수기에는 실업자가 되었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영양실조, 만성소화불량, 신경계통 및 호흡기 질환, 안질 등 대부분의 노동자가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건강검진이나 휴가 등 복지는 커녕 병세가 악화되면 해고조치 되는 일도 잦았다. 

 

보고만 있는데도 화가 난다.

1968년 12월 전태일은 재단사 10명을 모아 바보회를 결성했다. 바보회의 첫 사업은 노동실태 조사를 통해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태일은 이 일을 계기로 해고당했고, 바보회 활동은 중단됐다. 다시 삼동회를 결성해 노동환경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1969년 전태일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재단사들의 모임을 조직한 후 회장을 맡아 제작한 명함이다. 여기서 바보를 또 보다니, 눈물이 왈칵 났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기 위해 책에 휘발유를 끼얹고 점화하기 직전 연설대에 올라 외칠 구호와 선언을 다음과 같이 준비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근로감독관 임병주를 고발한다.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일주일에 1번만이라도 햇빛을, 1일 16시간의 작업에 임금 100원, 1개월 작업시간 440시간, 법정 작업시간 200시간, 여자와 소년은 단체규약이 있는 경우라도 1주 6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며 휴일근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자의 어머니
직접 착용한 신발, 안경, 지팡이 그리고 전화번호 수첩

전태일은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니는 그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창립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이 노조를 탄압했고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어머니는 맞서 싸웠고 결국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조의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전태일의 꿈 태일피복의 설립목적은 "정당한 세금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여진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이 사업을 위하여 나는 나의 전부를 여기에 바칠 것이다."

전태일은 노동환경 개선 노력이 번번이 좌절되자 업체를 직접 운영할 목적으로 태일피복이라는 모범업체 설립 계획서를 작성했다. 25매의 이 사업계획서는 시장조사에서부터 광고, 생산제품, 임금, 복지시설 등 오늘날에도 합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계획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전태일 그후... 나아졌다고,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상황만 달라졌을뿐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거 같다. 

 

어머니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사람 편에 서서 조건 없는 강력한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군사정권 시절, 약자의 편에서 연대하고 싸우다 네 번이나 구속되어 형을 받거나 수배생활을 했다. 구류 당한 횟수만 200여회나 된다고 한다. 재판정에서 의견을 큰 소리로 말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살기도 했고, 누군가의 장례위원장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배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여사가 아니라 태일이 엄마라꼬.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있는데, 또 눈물이 났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잊지 않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기념관만 들렸지만, 다음에는 동판거리와 다리, 동상 그리고 분신항거 장소까지 다 돌아봐야겠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 관람료는 없으니 한번쯤 들려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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