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돈의문박물관마을 "서울100년이야기관 & 작가갤러리 & 서대문여관 & 스코필드기념관"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서울의 근현대 모습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하드웨어는 변함이 없는데, 소프트웨어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한다. 지난 번에 왔을때와 달라진 곳 위주로 동네 한바퀴를 했다. 그 첫번째 이야기는 서울 100년 이야기관, 작가갤러기, 서대문여관 그리고 스코필드기념관이다.

 

경희궁 방면에 있는 마을 입구
삼거리 이용원 옆집에 서울 100년 이야기관이 생겼다~
도서관 느낌!

서울 100년 이야기관은 서울의 100년을 주제로 서적 및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서가이다. 시민들의 다양한 모임과 참여로 만들어가는 팝업 전시공간이라는데, 서울관련 책과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소개하는 영상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벽면에 있는 나의 도시, 나의 서울이야기~

서울에 살아서 행복합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1인이다. 나이를 먹었는지 공기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관이고,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을 한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작가갤러리

작가갤러리는 우리 동네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예술가 및 큐레이터들을 발굴 선정해 지원하고 전시도 한다. 작은 동네 미술관이랄까!

이번  전시는 창이적인 제작자들이 훼손가구를 새로운 가구로 재탄생시키고 그 가구를 필요한 곳에 기부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오늘이집과 대칼협동조합, 코끼리협동조합, 예술가 모임이 힘을 모아 만든 업사이클링 기부 프로젝트이다. 

 

미술관이 가구점으로 변신~
tic tca toe / 모락모락
피아노협탁 / 블록버스터

파도의 노래는 파도의 물결속에 자유롭게 노래하듯 헤어치는 고래의 모습으로 인류와 함께 지구에서 끝까지 살아남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옆 전시관으로 이동~
버려진 가구의 환골탈태는 업사이클링이다!
서대문여관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올 때마다 서대문여관은 그저 간판만 보고 지나쳤는데, 이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작가갤러리처럼 여기도 작은 미술관으로 3월 19일까지 '토끼를 잡아라' 신년기획전을 하고 있다.

참, 서대문여관은 주변에 관공서가 많고 교통이 편리해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출장용 숙소로 많이 사용됐다고 한다.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는 타일로 마감한 외벽을 남기고 내부는 기존의 여관 평면의 공간을 살려 구조보강을 했다.

 

요즘 모텔과 호텔과는 많이 다른 고시원 느낌이랄까? 밖에서 보는 거와 달리 공간이 좁아서 당황을 했다. 2층까지 있지만, 전시는 1층만 한다.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관계자외 출입금지라서 바라보기만 했다. 

토끼는 예로부터 사람들과 친숙한 대표적 동물 중 하나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이번 토끼를 잡아라 는 김선영, 전희성, Hey June 그리고 김주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 방마다 4인 4색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선영 작가의 방
작가의 디자인 서예
전희성 작가의 방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전희성 작가는 반짝거리지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짧은 글과 작은 그림으로 기록하고 기억한다고 안내문에 나와있다. 따뜻함이 몽실몽실 올라왔던 공간이다.

 

김주란 작가의 방으로 페이퍼퀼링 작품
Hey June 작가의 방
작품이 보니 역시나 따스함이 느껴졌다~

1층에서 바라본 2층 공간, 다음에는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방이 무지 작은데 방마다 문이 하나씩 있다. 방탈출은 아니지만, 저 문 밖에는 뭐가 있는지 매우 몹시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여관이니 아마도 욕실겸 화장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코필드기념관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있었다면, 1919년 3월 1일 그 현장에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있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에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이 일제의 억압 아래 있던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왔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에 담아 이를 해외에 알렸다. 34벉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로 불렀으며, 화성 제암리 수촌리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현장을 직접 방문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해외에 폭로한 인물이다.

 

1919년 서울 광장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사진

1919년 3월 1일, 스코필드 박사는 사진기를 들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의 시위 장면을 찍었으며, 언론을 통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국내외에 광범위하게 알렸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위 군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잡아야 했다. 나는 어느 일본인 가게 2층에 올라 신을 벗을 사이도 없이 베란다로 나가 급히 셔터를 눌렀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만세를 부를 줄은 몰랐다. 나는 파고다 공원 종로, 덕수궁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면 사진을 찍었다." (프랭크 스코필드)

 

독립선언서 낭독한 후, 만세를 외치는 시위행진 / 종이에 수성펜 작가 조미연

"10년간 벙어리가 된 채 살아온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과 생명까지도 내어놓고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자유를 위한 커다란 함성을 외쳤다. 아, 1919년 3월 1일에 울리던 그 함성이란! 수천 수만의 한국인들이 "만세! 한국이여 영원하라!"를 외쳤고, 나는 그 날을 켤코 잊지 못할 것이다."(프랭크 스코필드)

 

스코필드 서재
스코필드의 한국식 이름은 석호필!
2층은 스코필드 미니 도서관

3·1 만세운동을 직접 경함한 스코필드 박사를 3·1운동이 한국정신의 상징이라 말하며 희생과 자유, 정의의 3·1정신을 현재와 장래에 이어갈 것을 촉구했다. 1958년 한국에 돌아온 박사는 매년 3월 1일이 되면 당시의 회고와 함께 3·1정신을 알리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3·1운동은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항상 외세에 부딪힌 한국정신의 상징이다. 한국인은 3·1운동과 같은 정신적 운동을 언제나 전개해야 한다. 내가 모든 친지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국에 온 것은 이러한 운동의 영원한 지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동은 참음과 사랑과 자비를 토대로 언제나 계속돼야 한다." (중앙일본 1969.3.1)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하늘에서 보고 얼마나 애통하셨을까~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고학하며 세계적인 수의학자로 우뚝 선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데 남은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로"라는 유언을 남겼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미니 도서관에 색칠하기 공간이 있어요~

스코필드 박사 서거 50주기를 기념해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 일제의 탄압을 상징하는 서대문형무소,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사저인 경고장을 잇는 종로-새문안로-통일로의 중심, 돈의문박물관미을에서 기념관을 개관했다고 한다.

박사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어찌나 부끄럽고 죄송하던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기에 100년 아니 200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또 한번 다짐을 했다. 

2021.08.18 -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살아있다! (faet. 돈의문 VR체험)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살아있다! (faet. 돈의문 VR체험)

돈의문박물관마을 영화처럼 동상이 살아서 움직이지는 않지만,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늘 새롭다. 갈때마다 똑같다면 재미가 없는데,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갈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onion02.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