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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울 | 500년 한양 이야기 (in 서울역사박물관)

가장 많이 갔지만, 다른 박물관과 달리 늘 기획전시만 보고 나왔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어느 박물관을 가더라도 상설전시실에서부터 시작을 하는데, 서울역사박물관은 예외였다. 이번에는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상설전시실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서울 하나만으로 이렇게나 많은 자료가 있는 줄 몰랐다. 방대한 자료에 놀라, 3회로 나눠서 업로드 할 예정이다. 첫번째는 한양이라 부르던 조선시대의 서울 이야기다.

 

입장을 하기 전, 서울은 임금이 있는 도성이자, 한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한글이 창제되기 전부터 써오던 순수 우리말이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도, 고려의 수도 개성도 모두 서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의 수도가 한양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처럼 서울이라고 불렀다. 

한양에서 경성은 경술국치(1910년) 후 조선총독부가 서울의 행정구역과 기능을 크게 축소하면서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경기도 관할로 격하했다. 경성에서 서울은 해방 후 1946년 조선주둔 미군사령관인 A.L.러쉬 소장이 헌장에 의해 서울시가 경기도 관할에서 이탈해 하나의 도 수준으로 승격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서울시 헌장으로 제1조에서 우리나라 수도의 이름을 서울(SEOUL)로 명확히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헌고가, 서대문고가, 홍제고가의 흔적들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 부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재로 장식기둥과 주두의 일부라고 한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 내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홍례문과 그 좌우 행각 등을 헐어낸 자리에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청사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터 1982년까지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 청사로 사용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해오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거가 됐다.

광복 후 바로 철거가 됐는 줄 알았는데, 그후로도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기억은 전혀 안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시절에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한번은 가지 않았을까 싶다. 

 

오래 있어야 하니 출입구 옆에 있는 물품보관함에 가방을 보관~
기획전시실은 우회전을, 상설전시실은 2층으로 올라갑니다~
한양은 1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건설된 계획도시!

조선전기(14~15세기) 한양의 모습을 목판에 판각 후 채색한 1481 한양으로 조선전기 기록을 바탕으로 궁궐과 주요 관청, 사찰 및 역원, 도로와 물길을 재현했다. 도성 안은 짙은 녹색의 산경과 대비되도록 채색을 최소화함으로써 도시의 구조와 주요 시설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양은 풍수지리의 전통과 유교 사상에 따라 계획되고 건설됐다. 명당인 백악산(북악산) 아래 궁궐이 세워졌고, 중국 고대의 도읍 건설 원리에 맞게 종묘와 사직이 배치되었다. 한양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5부로 구성된 10만명의 생활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왕조 건국을 훈민정음으로 노래한 최초의 한글 책 '용비어천가'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기록한 남한산성에서의 항전 기록 '남한기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한양의 궁궐과 관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 시설물들이 훼손됐다. 궁궐 중건에 대한 논의는 선조 대에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광해군 대에 진행됐다. 가장 먼저 종묘를 중건했고, 이어 인정전을 비롯한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준공했다. 이듬해 5월에 사직을 복구했다. 그러나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복원되지 않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 옛 위용을 회복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 기간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징비록'
숙종때 북한산성 공사 책임자였던 승려 성능이 공사 내용을 담은 지리서 '북한지'

도성삼군문분계지도는 도성 수비를 위해 영조가 반포한 어제수성윤음 속에 수록된 지도이다. 조선시대 수도 방위를 담당했던 삼군문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각각 맡았던 경비 구역이 표시되어 있다.

 

한양과 경기도 지역을 포함한 수도 방위 주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 '기전도'
광화문 앞의 대로를 이르는 명칭 '육조거리'

한양의 도시구조는 궁궐을 축으로 형성되고 운영됐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을 내고 좌우에 의정부, 육조를 비롯한 국가 경영의 핵심 관청들을 배치해 육조거리를 조성했다. 육조거리는 궁궐과 연결되는 어가인 동시에 정치, 행정이 중심지였으며, 조선 8도로 들고나는 모든 도로의 원점이기도 했다. 

 

경복궁은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처음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이궁으로 새로 지었다. 창경궁은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이 거주할 목적으로 지웠던 수강궁 터에 성종이 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를 위해 건축한 궁궐이다. 

임진왜란 후 모든 궁궐이 소실됐다가, 창덕궁과 창경궁이 광해군 시절에 차례로 재건됐다. 경복궁은 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경희궁은 광해군8년 정원군의 옛 집에 세워진 궁궐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경운궁(현 덕수궁)에 거주하면서 궁궐은 모두 5곳이 됐다. 

 

경희궁 경헌당에서 영조와 왕세자, 관원들의 모임을 그린 '경헌당어제어필화재첩'
궐외각사는 국가의 핵심 관청으로 궁궐과 인접한 곳에 설치된 관정
의금부 관리들의 모임을 기록한 '금오계첩'
형조관리들의 모임을 기록한 '추관계첩'

한양은 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상저십리의 지역으로 나뉜다. 도성 안은 지형과 물길에 따라 북촌, 서촌, 중촌, 동촌, 남촌, 아랫대 지역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지역문화 양상이 달랐다. 

서촌은 백안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을 말한다. 조선초기부터 왕족과 권력층의 세거지였으며, 육조거리롸 가까워 서리, 녹사 등 하급 관리인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북촌은 백악에서 응봉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로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서쪽에 자리한 경복궁의 두 궁궐을 좌우에 두고 있다.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모여 살아 한양 양반들의 중신 터전이었다. 

 

운종가 시전 모형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부터다. 대부분이 거래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졌으며, 노동력을 돈으로 팔게 되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재산이 없는 지방 사람들이 대게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18세기 동대문 안쪽에 이현시장이 출현했고, 종로와 이현, 칠패 시장은 한양의 3대 시장이었다.

19세기 초 한양에서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고 장사로 먹고 사는 사람이 수십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한양은 주민의 대다수가 상인으로 구성된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운종가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으로, 흥인지문(동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에 있었다. 종루는 큰 종을 달아 도성의 대문을 여닫는 때를 알리는 시설로, 한양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이자 필수 방문지로, 한양에 다녀왔음을 확인하기 위해 종루의 창살 개수를 헤아려 보았는지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 아닌 자가 함부로 물건을 판매했을 경우, 이들이 판매하는 물건을 압수하고 판매자를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시전상인들은 이 금난전권을 통해 영업권을 가지지 못한 난전상인들을 억압하고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 15년 신해통공이 시행되어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이 폐지됐다. 

 

반궁도 태학계첩은 성균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림

한양의 동촌은 창덕궁의 동쪽이자 동대문 안 낙산 자락 일대를 말하며, 넓게는 성균관 일대까지 포함한다. 일찍이 아름다운 풍광으로 명문가들의 집을 비롯해 민가가 번성했으나 임진왠란을 겪으면서 주민들이 모두 떠나 한적한 곳이 됐다. 

 

영조가 대규모의 개천 정비 사업을 완료하고 이를 기넘하는 시를 모은 책 '어제준천제명첩'
오간수문 철책문 / 돌 거북이

내사산(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도성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으로 나간 중랑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간다. 이 내수를 가리켜 개천이라 하는데 오늘날에는 청계천이라 부른다. 개천에는 30겨 개의 지천이 있었는데, 이 지천들은 한양의 한복판으로 모여 개천으로 흘러들었다.

 

무안 박씨 박유성을 한학교수로 임명하는 문서와 역관 집안 천영 현씨 사람들의 호패

중촌은 개천(현 청계천)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를 말한다. 주로 역관, 의관, 법률가인 율관 등 전문직 관리나 관청에서 근물하는 서리인 경아전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중촌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동네였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의 '산수도'

남촌은 목멱산의 아래쪽에 위치했던 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계천 이남을 말한다.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황포돛대는 돛의 색깔이 황톳물로 물들여 누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다. 한양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망은 18세기 중엽 6대로, 18세기 후반 9대로, 19세기 후반 10대로 증가한다. 10대로는 한양-의주, 한양-경흥, 한양-평해, 한양-동래, 한양-봉화, 한양-강화, 한양-수원, 한양-해남, 한양-보령, 한양-통영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특히, 의주-평양-개성-한양을 잇는 관서대로는 사행로이면서 중국의 물자가 반입되는 중요한 도로였다. 남쪽의 물산들은 삼남의 길목인 광주 송파장에 모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참, 황포돛대는 조선시대 한강을 왕래하면서 상류로는 단양, 제천에서부터 하류로는 마포에 이르기까지 식량, 땔감, 소금 등을 수송하던 조운선이다.

 

한양으로 불리던 서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개항과 대한제국 그리고 경성으로 불리던 두번째 서울이야기는 커밍 순~~

2023.04.20 - 개항과 대한제국기 & 일제강점기의 서울 | 한양에서 경성으로 (in 서울역사박물관)

 

개항과 대한제국기 & 일제강점기의 서울 | 한양에서 경성으로 (in 서울역사박물관)

개항과 대한제국기 & 일제강점기의 서울 | 한양에서 경성으로 (in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한양이던 시절은 서서히 끝나가고 경성이라고 부르는 시절이 다가온다. 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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