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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과 대한제국기 & 일제강점기의 서울 | 한양에서 경성으로 (in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한양이던 시절은 서서히 끝나가고 경성이라고 부르는 시절이 다가온다. 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오호~ 통재라!"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런 과거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했을 거다.

그런데 어느 왕조로 돌아가야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고종은 너무 늦고, 영조대가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갈 시기는 정해졌으니, 타임머신을 만들어 줄 사람만 찾으면 된다. 앞으로의 내용이 암울하기에 우스갯소리로 시작해 본다.

 

1863년부터 1910년 개항과 대한제국기의 서울
서양 과학의 보급을 위해 중국에서 간행한 세계지도 '곤여전도'
19세기 망원경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 연안 곳곳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게 된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앞까지 와 서울을 위협할 정도였다. 외세의 압력이 현실화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지만, 그 움직임은 대세가 되지 못했다.

 

경복궁 중건과 군사비 조달을 위해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화폐 '당백전'

고종이 등극한 후, 1865년에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7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다시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도성의 정비는 궁궐에 그치지 않고, 의정부, 삼군부 등을 중건해 육조거리를 정비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서 처음 사용된 태극기

개항 이후 1885년 정부는 각국 공사와 협의해 서울에 외국인 거주지를 지정했다. 일본인은 남산 북쪽 기슭에, 청국인은 서소문과 북창동 및 청계천 수표교 주변에, 서양인은 정동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상단에 오얏꽃과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1904년 대한제국 여권
가운데줄 왼쪽부터 전화교환수와 통신원 임명장 그리고 조선전보총국 전보

정부는 1881년 일본에 사찰단과 청국에 유학생단을 파견하고,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냈다. 개혁에 반대하거나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그 속도와 방식으로 의견 대립이 심했는데, 결국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신문물을 접한 서울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기심, 놀라움, 감탄, 두려움 등의 복잡한 감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했으나, 곧 그것들이 편리하고 쓸모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중심지 '정동'
경운궁(덕수궁)
그때나 지금이나 정동길 주변은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했다. 각국 공사관과 신식 학교, 종교 시설이 모여 있던 정동은 서울의 새중심지가 되었다. 경운궁을 잇는 새 도로가 만들어 졌으며, 좁은 도로는 확장됐다. 

대한제국의 정궁 경운궁(현 덕수궁)에는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돈덕전 등 서양식 건물도 여럿 들어섰다. 이때 경운궁과 정동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문물의 공존을 추구한 대한제국의 개혁 이념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칭경기념비전은 고종 즉위 40주년과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갈 일을 기념하기 위해 1903년 항토현 사거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으로 조성했다. 독립협회는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보여주기 위해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건립을 명시했다. 각계각층의 모금으로 1897년 11월 독립문이 준공됐다. 독립공원은 정부와의 마찰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좌절됐다.

 

프랑스 공사관
서울의 지명을 영어로 기록한 노트
대한제국 소식을 전하는 외국 신문
서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이 쓴 책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정동에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설치되었다. 공사관과 함께 정동교회, 성공회성당 등의 종교시설과 시병원, 보구여관 등의 의료시설 그리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학교가 세워졌다. 정동은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무대가 됐다.

 

단발령이 시행된 뒤에는 서양식 의복과 모자, 신발 소비가 급증했다. 이와 함께 서양식 지팡이나 선글라스, 양산 같은 소품도 보급되었다. 도시 곳곳에 이발소와 목욕탕이 생긴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전기로 인해 전차는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전등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줬다. 

 

19세기 후반 개화의 거리 종로 풍경
임인진연도병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맞아, 경운궁에서 대규모 진연을 열었고, 그 광경은 10폭 병풍에 옮겨졌다. 임인진연도병은 제1폭부터 제9폭(오른쪽부터)까지에는 진연의 장면이 그려졌고, 제10폭에는 진연에 참가해 시상한 신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910~1945 일제강점기의 서울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해 조선이라 칭하고 일본 왕의 직속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조선 안에서 행정, 군사,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서울은 인천, 개성 등과 함께 경기도 소속의 여러 부중 하나인 경성부로 격하되었다.

 

섬나라 일본은 조선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켜 영구히 지배하는 한편, 대륙침락의 발판으로 이용하러 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대 국권을 상징하던 건축물은 대부분 파괴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고 가까이에 대규모 공공건물들이 새로 들어섰다.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그래프와 표로 정리한 통계엽서
조선총독부 원형 주두

커다란 지도 옆에 있는 표시는 일제가 훼손하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거나 새로 지은 건물에 대한 설명이다. 왼쪽 윗줄에서 아래로, 옮겨진 광화문, 경복궁 근정전 옆 조선총동부 신청사, 독립지사를 가둔 경성감옥, 경희궁에 들어선 경성중학교, 농리공원으로 변한 덕수궁.

오른쪽 윗줄에서 아래로, 놀이공원으로 변한 창경궁, 남산자락에 들어선 조선신궁, 비운의 장충단 공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 그리고 환구단을 부수고 철도호텔이 들어섰다.

 

동식물원, 박물관이 조성되어 놀이공원으로 격하된 창경원 이용 안내 자료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했던 조선물산공진회 전시장 위치를 안내하는 지도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박람회 안내 팜플릿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 업적 자랑을 위해 조선물산공진회와 조선박람회가 열렸다. 특히, 조선박람회는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열렸는데, 두번의 박람회로 인해 경복궁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시위가 시작된 탑골공원
3.1 독립선언서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마련되었다. 경성은 억압과 수탈 기관들이 집중되어 있어 의열투쟁의 최전선이 되었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조선의열단의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등은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와 송학선 등은 홀로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 1945년 7월에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이 친일 단체 행사가 열리돈 태평로 부민관을 폭파했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선어학회는 조선말 큰사전 등의 편찬을 시도해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섰다. (이부분은 자체 편집없이 이름까지 그대로 다 옮겼습니다. 그래야만 하니까요.)

 

1930년대 경성역의 하루 그 옆은 인력거
조지아, 미츠코시, 히라타, 미나카이 백화점 / 화신은 한국인 자본 백화점
조미료와 자극적인 식품이 이때 들어왔다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새로운 유행을 쫓아 1920~30년대 경성의 도심을 활보한 젋은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모던걸은 단발머리와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치마,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거나 양산을 든 근대적인 옷차림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앞장섰다. 모던보이는 값비싼 양복에 대모테 안경과 맥고모자를 쓰고 경성의 거리를 활보했다.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개시한 일본은 1941년 전선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했다. 전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화폐 증발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총독부는 생필품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배급 물자는 언제나 부족했다. 전시의 경성은 굶주린 주민들이 언제 전선에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강제 노역에 시다리는 거대한 수용소였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5년 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그 누가 예측했을까? 만약 우리 독립군의 힘으로 광복을 했다면, 단연코 초대 대통령은 그사람이 되지 않았을 거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으니, 또 실없는 소리를 해본다. 

 

한양에서 경성을 지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이야기는 다음주에 만나요~

2023.04.18 - 조선시대의 서울 | 500년 한양 이야기 (in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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