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을 통한 교류의 역사" 국립인천해양박물관 해양교류사실 II
아는 역사인데 교류의 바다 관점으로 바라보니 새롭다. 지난번에 선사시대에서 고려까지 했으니, 이어서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이다. 수도권 최초 해양문화시설 해양전문국립인천해양박물관의 해양교류사실이다.

조선시대


조선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수군 제도 정비에 힘쓰며 해안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해안의 주요 거점마다 수군진을 설치하고 병선과 병력을 배치했는데, 세종 때는 육군보다 더 많은 수군을 편성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통합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됐다.


조선 초기에는 류큐(오키나와), 섬라곡국(태국), 조와국(인도네시아) 등 남방 국가들과 교류했고, 15세기 들어서는 일본과 서로 사신단을 파견하며 교류했다. 명나라와는 육로를 중심으로 교류하다가 17세기 여진족에 의해 육로가 막히면서 해로를 활용했다.


세곡은 세금으로 납부하는 곡물이며,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배를 이용해 한양까지 운송하는데 이를 조운이라 한다. 조운선은 초기에는 소형 전투선인 병선과 형태가 유사했으나, 후기에는 전문적인 운반선으로 개조됐다.

조행일록은 1863년 함열 현감 임교진이 12척의 조운선을 이끌고 익산 성당창에서 한양 경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운 일기로, 이를 통해 조선 시대의 조운 과정뿐 아니라 조운선의 규모와 항해술을 알 수 있다.

마도 4호선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조선 시대 조운선이며, 거도선은 조운선에 딸린 종선이다. 조운선은 그 규모가 커서 육지 가까이에 정박하기 어려워 거도선이 육지와 조운선을 오가며 화물과 식량 등을 조달했다.

표류인 문순득 일기는 1802년부터 1805년까지 류큐, 오키나와와 여송, 필리핀에 표착한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를 담은 기록이다. 조선에 온 필리핀 표류인 환송 과정에서 제작되었기에, 현존하는 문순득 표류 기록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영국의 지도제작가 서넥스가 제작한 아시아 지도이다. 한국은 K of COREA, 동해는 The EASTERN OR COREA SEA로 기재되어 있다.

하멜표류기는 1653년부터 13년간의 조선에서의 체류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 서양인이 남긴 가장 이른 시기의 구체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다.



개항기와 대한제국

18세기 후반부터 서양 선박들이 조선 근해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인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긴 배라 하여 이양선이라 불렀다. 조선은 이양선의 침입에 대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이어서 영국 등 서구 국가들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개항 당시 제물포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넓어 큰 배를 접안하기 어려웠지만, 월미도는 만조 시 대형 선박의 입출항이 가능했다. 개항 후 월미도는 전 세계의 바닷길을 따라 흘러온 각국 선박들이 한데 모이는 요충지가 됐다.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침략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부산과 원산에 이어 인천의 개항을 요구했다. 당시 인천은 수도 한성의 외항 역할을 하던 곳으로 사실상 조선의 관문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으나, 결국 1883년 1월 인천이 개항되면서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관문이 열렸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선 사회는 외형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전등, 전화, 우편, 전차 등 새로운 문물과 제도들이 도입됐다.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신문물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뿐 아니라 의식까지 변화시키며, 조선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개항으로 조선은 근대로 가는 길과 열강의 침탈의 길을 동시에 마주하게 되었다. 개항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나갔다. 그 결과 1910년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며 조선은 해양 주권을 상실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의 주요 항구에 항만 시설을 구축하고 철도와 도로 등을 건설했는데, 이는 겉으로는 근대화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실상은 수탈을 위한 수단이었다.
대한민국

광복 직후 항만을 포함한 38도선 이남 전역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정의 통제하에 있었다. 인천항, 군산항, 묵호항, 목포항, 부산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됐다. 이 개항장들은 미군정의 수출입 통로로 활용되는 한편, 원조 물자의 수입 창구로 이용됐다.



해양수산부의 전신인 해무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해사 분야의 신속한 복구와 해상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수산, 해운, 항만, 조선 및 해양 경찰업무를 총괄하는 해사기구로서 발족됐다.

한국전쟁 당시 항만은 전쟁물자가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주요 전장이었다. 그 결과 전국 대부분의 항만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해무청을 중심으로 항만사업 5개년 계획(1955-1959)이 실시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항만 시설들이 차츰 복구됐다.

1980~1990년대에는 복합운송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항만 배후단지 및 지원 시설이 건설되면서 복합물류공간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종합물류, 산업, 생활문화 공간으로 기능히 확대되고 현대화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항만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가 일본보다 개항을 먼저 했더라면 일본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쇄국정책이냐? 개향이냐? 역사는 쇄국정책이 틀렸다고 말하듯, 2024년의 계엄도 틀렸다고 말할 거다. 역사는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24.12.23-"바닷길을 통한 교류의 역사" 국립인천해양박물관 해양교류사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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