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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태평성대이길" 태평계태평(太平繼太平) (in 서울역사박물관)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어진 임금이 다스려 백성들이 평안한 시대를 의미한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꼽는다고 한다. 2024년은 계엄의 시대였다면, 2025년은 태평성대가 오길 바라며,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태평계태평: 태평성대로 기억된 18세기 서울'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시 조로구 새문안로 55에 있어요~

조선 시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태평성대로 기억된 시대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18세기를 대표적인 중흥기로 꼽는다. 이번 기획전은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을 태평성대로 그려낸 작품 '성시전도'를 조명한다. 정조의 명으로 제작된 제작된 이 작품은 태평성대의 꿈과 이상을 서울의 풍경에 담아낸 글과 그림이다. 

 

성균관에 새워진 탕평비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지혜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정책을 추구했다. 정조는 선대왕의 업적 가운데 균역, 준천, 탕평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이는 영조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업적이기도 하다. 

균역법은 세금을 절반으로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세 제도이며, 준천은 도시의 물길을 정비해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토목공사이다. 그리고 탕평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한 정치적 방법론이다.

 

영조가 지은 탕평비문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미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노년의 영조가 백성을 생각하며 그린 바위
수문상친림관역 <어전준천재명첩> 1760년

청계천은 도성 안의 여러 물길이 모여 한양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매년 물이 넘쳐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영조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물길을 다스렸고 준천 사업을 큰 자랑으로 여겨 이를 기념하는 화첩을 만들었다.

 

어제갱진첩 1760년

준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다음 날, 청덕궁 영화당에서 참여자들의 공로를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다. 영조는 이 자리에서 준천 사업의 성과를 기념하는 시를 직접 지어 채제공에게 낭독하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게 했다. 이 첩은 그때 신하들이 써서 올린 갱진시를 모아 만든 것이다.

 

정조어제초계문신시사연구 1792년 이후

정조가 추진한 탕평정치의 핵심은 인재 양성이었다. 규장각에서 선발된 초계문신은 글짓기뿐만 아니라 활쏘기 시험도 치렀다. 이 첩은 정조가 초계문신들과 춘당대에서 함께 활을 쏜 뒤 지은 시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내각일력 1779-1883, 성시전도와 성시전도시가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기록

1792년 4월 정조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6명에게 한양의 도시 풍경을 그리게 한 뒤, 규장각 초계문신과 입궐한 신하들 33명게게 완성된 성시전도를 주제로 장편 시를 짓는 시험을 내렸다. 그림 성시전도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10여 편의 성시전도시가 남아 있어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과 그림은 18세기 한양의 모습을 담아낼 뿐 아니라,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장원으로 뽑힌 신광하의 성시전도시

성시전도를 주제로 한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신광하의 시권이다. 정조는 붉은 글씨로 이하일(二下一)이라는 등수와 소리가 있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직접 남겼다. 신광하는 그림을 직접 묘사하기 보다는, 한양의 성대함을 중국의 옛 수도에 빗대어 표현했다. 

 

겸재 정선의 창의문도

겸재 정선은 서울의 풍경을 진경산수로 담아낸 화가이다. 창의문도는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한양도성을 지키는 창의문의 모습을 담아낸 수작이다. 창의문 뒤로 보이는 인왕산의 기차바위와 그 위에올라선 주먹바위에 대한 묘사는 겸재의 남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겸재 정선의 서빙고망도성도

서빙고에서 바라본 도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 사대문과 궁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정선은 자주 사용한 부감 시점을 통해 가까운 서빙고와 두모포, 한강진에서부터 멀리 북악, 낙산, 인왕산, 남산까지 한양의 풍경을 담았다.

 

천하도는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를 고리 모양의 바깥 세상이 둘러싼 형태이다. 내대륙 중심에는 조선, 중국, 일본, 베트남 같은 실제 지명이 적혀 있는 반면, 외대륙에는 외눈박이가 사는 일목국, 머리가 셋 달린 사람들이 사는 삼수국 같은 상상의 나라들이 채워져 있다. 

 

고산자 김정호의 역작 대동여지도에 담긴 서울 지도

동여도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직접 손으로 그린 대축척 전국지도이다. 동여는 임금이 궐 밖으로 나가다는 뜻으로 임금의 발길이 닿는 곳, 즉 우리나라 전 국토를 의미한다. 동여도는 대동여지도와 마찬가지로 국토를 22층으로 나누어 한 층을 하나의 첩으로 만들어 보관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했다. 

 

 

남대문로는 종로와 함께 한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한강 나루로 통해 들어온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물산이 모두 남대문을 거쳐 한양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남대문로에는 약방과 서화사, 술집, 새책점 등 18세기 도시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들이 유행했다.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여 널리 유행한 병풍그림 '곽분양행락도'

서화사는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시장으로,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쌓은 중인 계층이 새로운 미술 후원자로 떠오르면서 서화를 감상하고 즐기는 문화가 도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특히, 궁중 장식화를 본뜬 병풍이 큰 인기를 끌었다.

 

남대문로를 따라 종로로 올라가다 보면 지금은 을지로라고 부르는 동네, 구리개를 만나게 된다. 18세기 구리개는 약방들이 밀집해 있어, 서울의 의료 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당시 서울에는 의약이 상업화되면서 안과, 소아과, 부인과 등 전문화된 의원들이 있었고, 약을 조제하는 전문 약방이 성행했다.

 

가문이 잦은 조선 시대에 술을 술을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도성을 가득 채운 술집은 사치와 유흥을 즐길 수 있는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성시전도시에서 한양 거리 곳곳을 밝힌 주등과 술집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18세기 후반 한양은 열 집 중 한 집이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일 만큼 주점이 가득했다고 한다. 

 

세책점은 돈을 받고 소설책을 빌려주던 조선시대 책방
삼국지연의 / 구운몽
홍길동전 / 열녀춘향수절가

광통교는 한양에서 가장 큰 다리로, 폭이 길이보다 넓어서 광통교라고 불렀다. 18세기 서울에서 가장 붐비던 두 길인 종로와 남대문로를 잇는 교차점에 위치해, 임금부터 걸인까지 한양 사람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장소였다.

 

각양각색의 상점들

종로는 18세기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고 해서 운종가로 불렀다. 시전은 하나의 품목을 취급하는 전문점으로 조선초에는 30여 개에 불과했지만, 18세기 후반에는 120여 가지의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시전이 300개 넘겨 운영됐다. 생필품부터 사치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던 운종가는 18세기 도시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이다.

 

백자는 생필품이자 사치품으로 한양 사람들이 선호하고 동경했던 문화 중 하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미술품의 소비계층이 왕실과 사대부에서 부유한 도시민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문양을 장식한 청화백자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졌다. 특히, 꽃이나 파초가 그려진 항아리와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길상문이 새겨진 그릇이 큰 인기를 끌었다.

 

태펑성시도

성시전도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정조의 꿈과 이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으로 태평성시도가 남아있다. 이 그림은 성시전도의 전통과 풍속화의 유행을 배경으로 제작되었으며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공간 속에 2,200명이 넘는 인물들의 생활 모습을 담아냈다.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과 유사하나, 서울을 상징하는 산과 궁궐은 찾아볼 수 없고 중국옷을 입은 사람들과 낙타와 코끼리 등 생경한 장면이 있다. 태평성시도의 풍경은 조선과 중국, 상상의 공간이 뒤섞여 현실이 아니 이상 공간으로 느껴진다.

 

정조는 왕과 신하, 백성들이 모두 평안한 세상을 꿈꾸며, 이를 성시전도에 담아 시각화했다. 성시전도에 그려진 서울은 왕도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화려한 상업도시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수와 풍수지리는 만세를 이어갈 국운을 상징하고, 북적이는 거리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문화는 나타낸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2024년 12월은 새벽이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고로, 2025년은 빛날 거라고, 제발 그럴 거라고 굳게 다짐해 본다. 정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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