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 "사도세자와 두 임금의 시선" (in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화 사도를 보기 전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마땅하고, 혜경궁 홍씨와 이산만 불쌍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쿵저러쿵 혼자 떠들어봐야 어차피 벌어진 일, 잠자코 관람이나 해야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획전 "사도세자와 두 임금의 시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에 있는 장서각은 조선 왕실에서 소장하던 귀중한 고문헌들을 수집, 관리하는 도서관이자 연구소이다. 조선의 궁궐에서 보관하던 12만 권의 왕실도서와 전국에서 수집만 민간 고문헌 6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가치 높은 자료로는 동의보감, 조선 왕 의궤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등이 있다고 다음백과(대한민국 구석구석)가 알려줬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책으로 봤던 사도세자의 죽음,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을까? 그리고 이를 지켜본 아들(정조)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을 57건의 자료로 풀어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어렵고 재미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포기하지 않고 관람을 마쳤다.
사도세자와 두 임금의 시선은 효장세자의 죽음, 사도세자의 탄생, 영조의 절망, 영조의 결단 그리고 정조의 비애 등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죄다 한자로 되어 있는 고문서라서 머리는 아팠다는 거, 안 비밀이다.
효장세자의 사망과 영조의 슬픔
효장세자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낳은 첫째 아들이자 부왕 숙종의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였다. 그런 아들이 죽었고, 영조는 아들의 임종을 지켰다. 참, 효장세자도 8세에 세자가 되었다.
효장세자가 사망한 1728(영조 4) 11월 16일부터 효장묘에 입묘한 1731년 1월 4일 사이에 상장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계사와 전교 등을 계제사에서 일자별로 정리한 책이다.
영조가 1728년 12월 손수 짓고 쓴 효장세자 연보를 판목에 새겨 간행한 뒤 녹색 비단으로 장황한 책이다. 도합 10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제첨은 전서로 적혀 있다.
사도세자의 탄생과 영조의 기대
1735년 1월 21일 축시, 창경궁 집복헌에서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죽은 지 7년이 지나도록 동궁 자리가 비어 있어 늘 조바심을 느꼈던 터라 그 감회가 남달랐다. 사도세자는 14개월 만에 왕세자에 책봉됐다. 어릴 때는 자못 영민했지만, 아비의 혹독한 교육열은 역효과를 냈다. 사도세자는 10세 무렵부터 공부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영조의 실망과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영조가 갓 태어난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5편의 잠언과 시편을 엮은 책이다. 이중 춘궁육잠은 태어난지 80일도 안 된 세자에게 돈효제, 존사부, 친현사, 근강학, 정용모, 무절약을 훈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영조가 독서와 일상을 통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이 책의 저술 동기는 먼저 세자를 훈계하기 위해서고 다음으로 자신의 생활에 대한 반성 자료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1784년 9월에 공조참판 유의양이 정조의 명을 받아 시강원의 역사와 조직, 세자의 교육 과정과 제반 의식 등을 정리해 편찬한 책이다. 조선에서 세자 기간이 가장 길었던 경종과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정해지고 14개월 만에 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동궁 시절에 공부한 책수가 여타 국왕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일탈과 영조의 절망
사도세자는 공부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온갖 핑계로 강학을 건너뛰기 일쑤였고, 서연이나 소대 시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다반사였다. 이런 아들이 못마땅한 영조와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면서 부자간의 갈등은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도세자의 울화병은 어느새 극심한 정신질환으로 이어졌고, 광적인 증상과 기행이 잦아졌다. 누차 자살 소동을 볼였고, 남몰래 춘화와 음란소설을 탐독했으며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렸다. 궁 밖을 몰래 출입하다가 급기야 평양까지 몰래 다녀왔는데, 모두 대리청정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둘 사이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세손 정조가 영민한 자질과 근실한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세손의 존재가 영조에게 새로운 희망이자 대안으로 떠올랐고, 영조는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훈계의 글을 살뜰히 써 주었다.
정보는 사도 온양 행차 시 황석기가 수가했다는 이유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며칠 뒤 그가 이 예제예필을 진헌하자 감동한 나머지 병조판서로 하여금 그의 소원을 묻게 했다고 한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인 1759년(영조 35) 8월부터 1761년 12월까지 강서원에서 진행한 교육 과정을 좌익선 박성원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진강은 전날 배운 것을 복습하는 온강과 새로운 것을 배우는 원강으로 구분했다. 8세가 된 세손 정조는 소학, 논어, 대학 순으로 학습하되 음독을 익히고 나서 축자 해석을 배우는 방식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부터 1763년 사이에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내린 글을 정리한 책이다. 표제는 어제이고 표제 아리에 서시세손이라 적혀있다. 영조가 임오화변을 전후한 시기에 세손 훈유문을 연거푸 제작했다는 사실은 세손 정조를 사군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영조의 결단과 영빈 의열의 현창
1762년 윤5월 13일 새벽, 사도의 생모 영빈이 경희궁으로 찾아와 아들의 죄상을 고하며 대처분을 요구했다. 영조를 결국 사도의 처분을 결심하게 된다. 일의 기미가 사전에 누설될까 비상사태에 준하는 경비를 명했다. 궐문과 도성문은 통제되었고 삼군영과 호위청 군사가 즉시 소집되었다.
선원전에 가서 열성에게 그 사유를 고한 뒤 죽은 아내의 혼전인 휘령전에서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찌는 듯한 폭염이 한창이던 때 정신이 온전하지 않던 사도는 뒤주에 갇힌 지 아흐레 만에 사망했다.
영빈의 결단 덕분에 종사가 안정되고 의리와 윤리가 밝혀졌다는 이유로, 그녀가 사망하자 묘소에 의열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이듬해 시호 의열을 하사했다. 영빈의 의리와 충렬이 강조될수록 사도의 불의와 불충은 선명해졌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재촉하던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겠다는 명을 구두로 내림으로써 세자와 춘방의 권한을 박탈했다.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자정이 넘었을 때, 폐세자 반교문을 친히 써서 경향에 반포하면서 자신의 아들이자 일국의 소조인 사도를 폐위하고 처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했다.
1762년 윤5월 22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최초의 제문이다. 부자로서의 인연이 세자의 잘못으로 끝났음을 언급하더니 독서의 교훈과 자신이 지어 준 여러 훈서를 도외시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세자의 불효를 꼬집었다.
1763년 5월 21일 사도세자 연제 때 영조가 지은 제문이다. 연제는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1년 전 세자의 죽음을 떠올리며 제문을 시작하더니 이전 제문과 묘지문의 경우처럼 상나라 태갑과 자신이 지은 훈서를 언급하며 세자의 악행과 배은망덕을 꼬집었다.
"아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작년을 추억하니 내 마음 어떠한가? (중간생략)
아아~ 너를 위해 개탄스러운 것은 태평 시절에 태어난 나처럼 고난을 겪지 않은 점이다.
따라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해 일마다 방만하고 소홀했고 (중간생략)
가여운 혜빈은 애간장을 태우고 외로운 자식들은 그저 아비 없음을 슬퍼하네.
내 마음도 슬프니 구천의 너는 오죽하랴. 세월이 흘러 어느새 연제일이 되었구나."
1764년 2월 23일에 영조가 경희궁 경현당에서 세손 정조에게 효장세자 계통 승계의 의미와 동궁으로서 세손의 책무에 대해 권면한 말을 옮겨 적은 첩이다.
영조가 영빈이씨의 의열을 현양하기 위해 찬술한 책이다. 영빈을 위한 표의와 사도를 위한 수은에는 충과 역, 의와 불의라는 상반된 개념이 담겨 있다.
정조의 비애와 사도세자 추숭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본인이 사도의 아들임을 천명하더니 생부 추숭의 의지를 드러냈다. 먼저 착수한 부분은 생부의 호칭 및 육체와 혼령이 깃든 공간이다. 영조의 뜻을 거슬러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묘를 영우원과 경모궁으로 승격했다.
사도 추숭의 최종단게는 행장 찬술과 문집 간행이다. 정조는 행장에서 생부의 삶을 기술하된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행적을 과장한 경우가 많았으며 인용 서적의 실체도 불분명했다. 정조의 교정 범위는 개작에 가까웠고 타인의 작품을 생부의 문집에 끼워넣기도 했다. 정조의 그릇된 추숭 방식은 부친 행장과 문집의 신뢰성에 큰 흠결을 남겼다.
"머지않아 모레가 찾아오리니, 망극한 그리움을 도무지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저는 매년 오늘이 되면 지극한 슬픔이 갈수록 망극해지니 재차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모친께서는 일단 무탈하시나 평소의 수라를 물리치신 지 이미 아흐레가 되었기에 몹시 근심스럽습니다."
임진예찰은 1772년 1월 2일부터 동년 5월 24일 사이에 세손 정조가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37통의 예찰을 장황한 첩이다. 전시하는 예찰은 5월 19일과 21일에 쓴 것으로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그리움과 혜경궁의 비탄이 드러나 있다. 편지에서 말한 모레와 오늘은 5월 21일 사도의 기일을 가리킨다.
정조는 1776년 3월 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자마자 대신에게 윤음을 내리며, "아! 괴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운을 떼더니 "예법은 엄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인정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생부 추숭의 의지를 완곡히 표명한 것이다.
1776년에 사도세자에게 시호를 추상하고 묘소를 원으로 승격시키는 제반의절을 편집해 정리한 의궤이다. 각종 의장, 옥인, 죽책, 표석 등을 제작하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1795년 1월 17일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추상할 때의 옥책문과 당시 제작한 금인의 인영으로 구성된 첩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자에게 여덟글자 존호를 옥책, 금인과 함께 올린 유일한 사례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시호를 올리더니 원자 탄생, 세자 책봉, 생모 회갑을 맞아 세 차례 존호를 추상했다. 사도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의 즉위요, 손자의 탄생과 세자 책봉이요, 동갑내기 아내와 자신의 환갑이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정리해 만든 의궤로, 생부 사당에 대한 추숭 작업을 일단락 짓는다는 의미가 있다.
할아버지는 자식의 죽음을 감추려 했고, 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지만, 정조가 왕이 되자마자 "나의 아비는 사도세자요."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과정을 다 봤지만, 그때는 힘이 없어 기다렸을 거다. '내가 왕이 되면 싹 다 갈아엎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아들 그리고 아들을 죽여달라고 고했던 어머니와 남편보다 아들이 우선이었던 아내. 두 임금의 시선만큼 두 여자의 시선에도 관심이 간다.
2020.11.23-혜경궁 홍씨 지음 한중록 | 중전이 되지 못한 세자빈 대비가 되지 못한 왕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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