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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그 역사의 흐름 한국금융사박물관

구한말에 100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돈, 그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 중구 태평로 1가에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을 찾았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35-5에 있어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1912년에 건립한 한성은행 건물로, 1963년에 화제로 전소된 후 외형을 살려 재건했다. 이따가 자세히 나오겠지만, 한성은행은 1897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이자, 순수 민간자본으로 세워진 상업은행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 설립된 조흥은행의 전신에서, 2006년 신한은행과 통합했다. 

한국금융사박물관(3, 4층)는 우리나라 금융 발전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1997년에 신한은행이 설립한 국내 최초의 금융사 전문 박물관이다. 화폐, 고문서 등 국내 금융사에 관련된 약 6,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전통시대 금융①: 고대 ~ 조선 전기

볍시와 토기, 베

고대사회는 농경 기반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 물물교환을 했다. 그중에서 교환이 쉬운 곡물, 베, 조개껍데기, 생산도구 등을 화폐 대신해 사용했는데 이를 물품화폐라고 한다. 

 

건원중보 동국중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윗줄) / 삼한중보 해동중보 해동통보 (아랫줄)

고려 성종 15년(996)에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화폐인 철전이 주조됐고, 숙종 2년(1097)에 최초의 화폐 제조 관청인 주전관이 설치되어 삼한통보와 해동통보를 주조했다. 그러나 금속화폐는 전국적 유통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포(베)와 쌀 등 물품화폐를 사용했다. 

 

조선통보해서체 조선통보팔분서체 (윗줄) / 전폐 (아랫줄)

조선은 건국 초기 경제 체제를 재편하기 위해 무본억말과 중농억상 정책을 펼치며, 국가 주로도 화폐 주조와 유통 이권 장악을 위한 시도를 했다. 태종 1년에 사심서를 설치하고 저화를 발했지만 유통 부진으로 실패했고, 세종 6년 조선통보를 발행했지만 원료 문제와 발행량 부족으로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았다.

전폐는 평상시에 법화로 사용하고 유사시에는 화살촉, 무기로 사용해 경제, 군사적 이득이 있었지만 유통이 활성화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16 고구려 본가4 고국원왕 16년조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금융정책이자 빈민 구제 제도는 고구려 고국천왕 16년에 시행된 전대법이다. 국가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가 끝난 후 갚게 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는 의창으로, 조선시대는 의창, 사창의 지도로 정비되어 발전했다. 

책의 내용은 "고국천왕 16년 10월... 중외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손이 없는 자, 병약자, 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운 자는 널리 물어 구휼케 하였다... 또한 유사에 명하여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을 내어 백성의 호구 다소에 따라 곡식을 빌려주되, 차등을 매기고 10월에 이르러 관에 반납케 하여 이를 매년 시행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전주군 만인계통표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계)

계는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상호협동조직이다. 삼국시대의 신라에는 가배와 화랑의 향도, 고려에는 동년계, 문무계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교육이나 학비 조달의 학계, 길흉부조를 하는 상계 등이, 개항 이후에는 저축계, 식리계를 비롯해, 도박 성격의 직박계, 산통계가 있었고, 지금의 복권과 비슷한 만인계 등이 있었다.


전통시대 금융②: 조선후기

상평통보와 별전

상평통보는 숙종 4년부터 고종대 근대화폐가 발행되기까지 통용된 금속화폐이다. 상평이란 상시평준의 줄인 말로 화폐가 물품 또는 재화와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항상 평형을 유지하기를 기원하는 뜻의 전명을 가진다. 형태는 납작하고 둥그며 중앙에 네모난 구멍이 있으며, 발생 시기와 발행처에 따라 크기와 명칭이 다양해 3,000여 종에 이른다. 

별전은 화폐의 원료인 구리의 순도와 무게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 삼아 만들었던 시주화이다. 주로 소망을 기원하는 글귀나 길상, 벽사 등과 관련된 문자와 문양을 장식해 왕실이나 사대부의 패물이나 애장품으로 사용했다.

 

18세기 농업 생산력 증대와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물품의 교환과 상업 활동에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상품교환경제의 발달과 함께 화폐경제로 돌입했다. 상평통보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폐로 조선 말기까지 약 200여 년간 유통되었다.

 

어험법론, 어음, 어음

조선 후기 상업 거래에서 동전은 장거리 상업 활동에서 운반상의 문제가 있어, 환이나 어음 같은 간편한 신용화폐를 사용하게 됐다. 환은 원거리에 동전을 보내거나 직접 가지고 가기 어려울 때 사용한 것으로 대규모 거래에 사용됐다. 어음은 일정한 금액의 지급을 보증하는 채용증서로 규모가 작은 거래의 거래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신용도가 높은 객주나 상인이 발행한 어음은 현금보다 선호되기도 했다.

 

보부상 임명장

보부상은 다수의 행상과 동료를 규합하는 계의 형태로 전국 규모의 상단을 조직해 유통경제를 담당했다. 보상은 주로 귀금속이나 장식품 등의 비교적 값진 물품을 판매했으며, 점차 자본을 축척해 객주로 성장하기도 했다. 부상은 토기, 생선, 그릇과 같은 생필물을 취급하는 행상으로 지게에 얹거나 등에 지고 다니며 판매했다. 

 

금융거래에 사용된 도구
상인들이 계산할 때 주로 사용했던 산가지
한성은행 본점 소안동 영업소
한성은행 본점 다동 영업소
한성은행 신축 본점


근대기 근융: 개항 이후 ~ 대한제국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금융기관은 고종 15년 6월에 설립된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다. 이후 제18은행과 제58은행 등 일본 은행이 줄을 지어 설립되었다. 원산, 인천, 부산 등 개항장과 서울에 홍콩상하이은행, 한·러은행 등 많은 외국은행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 은행이 가장 많았고, 일본 제일은행은 한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금융계를 장악하면서 식민지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한성은행 초대 임직원 명장

한성은행, 조선은행, 대한은행, 대한천일은행, 특립제일은행 등 우리 자본으로 민족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조선은행은 설립 후 곧 문을 닫았고, 나머지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국채보상운동 유네스코 인증서 / 유네스코기록유산 명패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1,300여만 원의 일본 외채를 국민의 모금으로 갚고 경제 독립을 이룩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된 경제주권 회복 운동이다. 부녀자들은 각종 패물과 머리채를 팔아 모은 돈을 맡기고, 보석이나 옷가지를 희사하며 의연금을 거출했고 노인과 아낙네, 노동자, 기녀, 일본 조선 유학생 등 가난한 서민층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온갖 계락과 탄압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좌절됐다. 

 

일본제일은행권

대동은전은 고종 19년에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화폐이다. 유통되자마자 부유층의 수중으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동전의 원료인 중국 마제은 가격이 올라 9개월 만에 중단됐다.


일제강점기 금융: 경술국치~광복 이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을 강탈당한 우리나라의 경제와 금융은 일제의 통제하에 관리되었고 외관상 근대화를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시 경제체제에 따라 점차 식민지 금융 체제로 개편되었다.

조선은행권

조선은행권은 1914년부터 해방 이전까지 총 18종이 발행되었으며,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만주 및 중국 본토까지 통용됐다. 주로 조선총독부의 직영 공장에서 제조되었으나, 일부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일본은행권과 함께 제조됐다.

 

독립공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 독립 및 조국 광복 달성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목적을로 독립공채조례 및 공채표발행규정, 공채모집위원규정을 공포하고 독립공채를 발행했다. 

 

대일본제국정부 대동아전쟁 특별국고채권 100원 / 할증금부 전시보국채권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의 통로로서 조선의 식민지 공업화 및 병참 기지화 정책을 전개했다. 국내 금융기관에 전쟁자금 확보 기반의 역할을 강제로 부여하고, 대대적인 소비 절약과 강제 저축 운동을 추진해 마련된 돈은 군수산업과 전시 국채 구매 비용으로 사용했다.


해방 이후 금융: 광복 이후 ~ 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식민지 통화·금융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미 군정기에 직면한 재정위기와 물가 폭등 및 통화 남발 등의 혼란에도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화폐개혁을 착수했으며, 자주적 통화금융 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해방 이후 조선은행권과 미군 군포
한국 전쟁 중에 발행한 최초의 한국은행권
원에서 환으로 제2차 긴급통화조치의 한국은행권 
한화 은행권의 체계 정비
제3차 통화조치 이후의 한국은행권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해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환표 시 화폐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10:1 비율로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 줬다. 당시 화폐는 모두 영국에서 제조되었고, 도안은 남대문, 독립문, 총석정 등 문화유산과 한국은행 휘장을 사용했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 화폐가 현재의 액면체계를 갖추게 된 시기이다. 한국은행은 기존의 백원, 오십 원 은행권을 주화로 대체하고, 경제발전으로 인한 고액권의 필요성 증가에 따라 고액권을 발행해 현재와 같은 액면체계를 구축했다. (이 부분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비슷해서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국금융발전사: 1980년대 ~ 

1980년대 금융 자율화 시대로의 진입, 1990년대 전자금융 시대 그리고 현대의 비대면 디지털 은행 창구까지 은행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최초의 주주명부와 신한은행 창립안내장

1980년대에는 실물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에 비해 금융 산업의 비효율성이 커지며 은행의 수익성과 경쟁력이 저하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해결을 위해 정부는 일반은행 민영화, 경영 자율화, 업무영역 확대 등을 추진했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 전격 시행!
1997년에 IMF에 긴급구제 금융을 요청, 2001년 8월 23일에 전액 상환!
80년대 야간금고는 현금자동입출금기의 원형

동전 교환 카트기는 리테일 서비스 카트기라고도 했는데, 영업시간 중 은행을 찾을 수 없는 시장 내 소형 점포 상인들을 위해 은행이 운영한 서비스였다. 은행원이 직접 카트기를 밀고 다니며 상인 등의 일반시민을 찾아가 화폐를 교환해 주는 서비스와 더불어 고객으로부터 예금액을 받아 입금해 주는 출장 수납 서비스도 제공했다.

 

과거 은행창구를 재현한 영상!

금융 자율화가 시행되면서 1982년 7월 7일 건국 이래 최초로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이 신한은행이다. 창립 첫날 한국 금융사상 초유의 실적인 5,017좌에 약 360억 원의 예금을 유치했으며, 첫 영업점인 서소문 지점의 개점을 시작으로 1984년 말 26개 영업점으로 확대했다.

 

통장과 카드의 변천사
최초의 무인 자동화 점포 신한은행 365일 바로바로코너

1990년 12월 신한은행은 명동과 김포공항 지점의 365일 24시간 코너에 CD기를 설치하고 연중무휴로 운영했다. 각 기기의 정면에는 대형 거울을 부착해 출금 시 위험 여부를 알 수 있도록 했고, 비상벨과 전용 전화를 설치해 기계 고장 등 비상시에는 본부 종합상황실 및 인근 지점에 즉시 연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은행창구
고객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는 대여금고

요즘은 은행에 갈 일이 많지 않다. 현금보다는 카드를 주로 사용하기에, 현금은 얼마 들고 다니지 않는다. 막상 은행에 가더라도 창구보다는 ATM에서 다 해결을 한다.

미래의 은행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점점 인력은 줄고 그 자리를 AI가 채우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지폐나 동전이 사라지고 전자화폐 시대가 올 거라 확신하다. 솔직히 그밥에 그나물일 줄 알았는데, 화폐를 통해 본 역사는 익숙함 반, 새로움 반이다. 

2023.02.28 - 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워~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워~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많을수록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돈이 아닐까 싶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only'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돈은 있으면 좋고, 더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하염없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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