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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feat. 정동산책 그리고 서울)

바닥에 앉아 하늘천 따지 검은현 누를황을 외쳤던 사람들에게 책상에 앉아 서양식 교육을 배우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을 거다. 환경도 수업방식도 어색한데, 파란 눈의 선생은 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격동의 구한말, 봉쇄가 정답이 아니었기에 고종황제는 배재학당을 수용했다. 신교육의 발상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가다.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1길 19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일까? 뒤일까?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본관은 아니고, 19216년에 준공한 동관이다. 지금은 동관만 남아 있지만, 본관(1887년 준공, 1932년 철거), 서관(1923년 준공) 그리고 1933년에 준공한 대강당과 광복 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서관은 배재중·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복원됐지만, 다른 건물은 배재공원을 만들면서 철거가 됐다. 동관은 외장 및 치장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 당시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헨리 G. 아펜젤러는 미국 선교사 출신으로 배재학당을 설립한 인물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내와 함께 인천을 통해 입국했다. 그는 선교에 앞서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정동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신앙과 지식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했다. 정동교회도 그가 설립했다.

1902년,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일어난 충돌 사고로 인해 아펜젤러(44세)가 탄 배가 침몰했다. 그는 정신학교 여학생을 구하러다가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황제는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한 교실체험관!
상설전시실
배재학당에 사용되었던 실제 벽돌

배재학당은 한학 중심의 서당교육에서 벗어나 영어, 한문, 언문을 기본 교과목으로 하고, 과정과 학년에 따라 수학, 과학, 역사, 세계지리, 체육, 음악, 미술, 의학 등을 가르쳤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의 자유, 민주, 민족주의 교육 정신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개혁사상을 전파하는데 중추적인 역활을 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무서운 탄압에도 배재학생들이 당당하고 꿋꿋하게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지만, 박해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종황제의 현판하사
배재학당 초창기 교과서
개화기 국어 교과서 '국민소학독분' /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지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

명예의 전당은 김소월, 나도향, 주시경, 서재필, 윤치호, 지청천 등 한국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배재인들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주시경 선생의 친필 이력서와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바닥에 나와있는 학칙 중 몇가지를 소개한다. 배재학당 학칙은 189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제정됐다.
하나, 학자금이 없는 이는 일자리를 주고 제 힘으로 벌어서 쓰게 한다. 그당시 수업료는 3양으로 다달이 내야했다.
하나, 학생은 반드시 줏대가 있어야 하고 모든 일에 예를 지키며 국법을 범한 자는 법관에게 넘긴다.
하나, 해가 지면 제 방에서 공부하고 밤 10시 후에는 등불을 끈다.

 

학교 소개와 교과과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일람
배재학보 교지와 배재학당 통신부
학생 수첩과 배지, 교복단추 / 각종 운동대회 기념 펜던트와 메달

1920년 3.1 운동 1주년이 가까워 옴에 따라 일제는 순찰을 강화했다. 배재는 일제의 허를 찌르며 3월 2일 평소와 같이 700여 명이 등교해 조회를 마치고, 주모자나 조직도 없는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배재를 만세학교라 불렀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작가 이사벨라 비숍이 조선을 방문한 후 쓴 여행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다. 배재학당 교육의 중요성을 기록한 글리 실려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한국 최초의 영문 월간 연속간행물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풍습, 종교, 언어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 서재필(배재학당 교사)은 조선에서의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글 'What Korean needs most'를 수록했다.

 

2층으로 올라갑니다~
아펜젤러와 그의 자녀들을 만날 수 있는 기념관

설립자 아펜젤러의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대강당을 신축하면서 가지고 온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아노이다. 배재 출신의 피아니스트 백건우, 한동일, 이홍렬, 김순열 등 학창시절 이 피아노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쓰던 책상

아펜젤러의 장남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한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미국인이기도한 장녀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6대 학장을 역임했다.

미국에서 사망한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나의 뼈를 나의 고국이요. 사랑인 한국 땅에 묻어 달라"라고 유언을 남겼고, 1954년 10월 18일 화장된 유골이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아내 루스 노블의 유해도 남편과 같은 곳에 있다.

 

가족 사진첩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자필 일기(아버지)
헨리 다지 아펜젤러 자필 일기(아들)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유품으로, 선교사 사진 및 사용했던 필기구, 부인의 어린 시절 사진, 자주 독립 수예품 그리고 바취와 백동전 등이다.

 

기획전시 "정동산책 그리고 서울..."
덕수궁 조감

정동은 조선을 벗어나 대한제국을 자주적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몸부치치며 노력했던 동시에, 강대국들의 수탈에 의한 서글픈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의 정동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정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을 건축가 임진우의 시선을 통해 담아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화박물관,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와 덕수궁 대한문, 중화전, 석조전
정동극장, 덕수궁 돌담길, 구 신아일보사 사옥
성공회 성당과 구세군 중앙회관
구 러시아 공사관과 중명전
서울산책은 여기!
서촌 옥인빌라 옆 불국사, 서촌 옥인빌라, 서촌 신교동 계단길, 자하문길
혜화동 골목, 암사동, 청운동 빌라
남산 팔각정과 서울타워, 남산공원
이화벽화마을
명동성당
서울역, 숭례문, 신촌, 성수동
2020년 광화문 광장

정동길을 그렇게나 자주 다녔는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있는 골목은 처음이다. 서울에 있는 박물관(사설 예외)은 거의 다 가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 가야할 박물관이 더 있는 듯 싶고, 계절도 서서히 가을로 넘어가고 있으니 자주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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