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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기념관

남산 중앙정보부는 KCIA(중정)가 서빙고 보안사는 육군이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이 소유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국민들에게 나라가 준 건, 공포의 정치로 고문이었다. 현재 중정 본관 건물은 서울유스호 호텔로, 보안사는 터만 남아있다. 그곳과 달리,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영역 근처 좁은 골목을 들어가니, 주변과 다른 철사줄로 꽁꽁 묶인 회색 담장이 나타났다. 지도앱을 보면서 왔지만, 이제는 그만 봐도 될 거 같다. 담장만 봐도 제대로 찾아온 거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휴관이었다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재개관을 했다. 예전같으면 그냥 갔을텐데, 이번에는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했다. 시간대별로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고,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내실에서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야 한다. 혼자 관람이라서 해설사 관람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해설사 동반이 필수다. 그래야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몰랐기에 관람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을 메모했고, 나중에 안내실에 있던 해설사분에게 물어봤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다. 1976년 지상 5층 규모로 신축됐지만, 1983년 7층을 증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원래 목적을 감추기 위해 00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철저히 위장을 했다고 한다. 국가안보를 내세웠지만, 실제는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정권안보의 전위대였다.

 

기자협회 집단구속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삼척·김제 고정간첩단 조작사건, 민청련 민추위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수많은 학생과 민주화인사, 일반시민 등이 이곳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영화 1987을 봤다면, 이곳이 낯설지 않을 거다.

 

고문경찰들이 일을 마치고, 저 건물에서 샤워도 하고 밥도 먹고 그랬던 곳이라고 해설사가 알려줬다. 현재는 비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민주인권기념관이지만, 정식 개관은 아니라고 한다. 올 하반기에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서 2020년 정식 개관을 한다는데, 그때는 모든 건물을 다 볼 수 있길 바래본다. 지금은 정문과 1층 대공분실 전시실, 5층 대공분실 조사실 그리고 4층 박종철 열사 전시실만 관람이 가능하다.

 

다른 층과 달리 유독 5층만 창이 매우 몹시 작다. 건물을 완공한 후, 고문실로 활용하기 위해 나중에 창문을 교체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해설사 왈, 설계를 할때부터 5층만 다르게 했단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처음부터 알았던 게 아닐까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건축가는 검은 벽돌을 애용했다는데, 다른 곳과 달리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물에서부터 공포가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1층 대공분실 전시실
세계인권선언
연행자 전용 엘리베이터

이렇게나 좁은 엘리베이터가 또 있을까? 안내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양쪽에서 몸을 잡고 두세 사람이 타면 꽉 찰 만큼 좁은 구조로, 1층과 5층만 운행을 했다. 잡혀왔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을텐데, 본격적으로 고문을 당할 5층은 아직인데 고문은 벌써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엘리베이터는 운행하지 않는다.

 

1층에서 본 철제로 만든 나선계단

1층에서 올려다보고, 5층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데, 계단이 다 보이지 않는다. 이게 바로 나선형 계단의 특징인 듯 싶다. 1층에서 5층으로 바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층계참이 없어 도중에 빠져나갈 수 없고, 눈을 가린 채 오르면 방향 및 공간 감각을 잃어 공포감은 더욱 고조됐을 거 같다. 게다가 철제계단이니 그 소리는 오죽했을까? 5층 창문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에 나선계단까지 고문을 하기 위한 맞춤건물같다.

 

5층 대공분실 조사실

비상대피 안내도를 유심히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시선이 꽂혔다. 15개의 조사실, 그저 안내도뿐인데 벌써부터 오싹함이 느껴진다. 

 

예전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공포스럽다.

예전에는 욕조까지 있었다는데, 지금은 변기와 세면대만 있다. 타일 역시 현대식으로 바꿨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바꿀 수 없다. 그건 아프고 슬픈 우리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까에 비해 여기는 넓은 방이지만, 방의 크기만 달라졌을뿐 여기서 저기나 다 똑같다. 그나저나 방마다 있던 커다란 철제 구조물이 궁금했다. 혹시 고문 기계가 아닐까 살짝 의심했는데 해설사 왈, 난방장치란다. 건물 외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내부는 보수를 많이 한 거 같다.

 

남영동 515호 故 김근대 선생 추모전

남영동 대공분실 515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이 1985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를 당했던 조사실이다. 현재의 모습은 2000년경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를 통해서 당시 형태를 짐작할 뿐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목재 타공된 방음벽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1983년 학생운동 출신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 초대 의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 추진위 배후조정 혐의로 경찰에 체포 연행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른바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영화 1987을 볼때도 화가 많이 났는데, 현장을 보니 분노가 치민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4일, 시국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고 경찰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경에 사망하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병원 의사가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고, 사건은 질실사로 정정 발표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의자와 책상이 고정되어 있다. 의자를 옆으로 돌려 사람이 앉힌 다음에 원래 위치로 의자를 다시 돌려 놓는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에 무슨 짓을 했을까? 의자에 앉는 것조차 통제를 했으니, 다른 건 오죽했을까 싶다. 아, 정말 싫다.

 

아까는 놓쳤던 흔적, 조사실은 비어있지만 책상과 의자를 고정한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김근태 선생은 다이알 비누향을 맡지 못하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유는 얼굴에 노란 수건이 덮히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그 수건에서 다이알 비누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4층 박종철 기념전시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불의에 맞서 싸웠다.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우리 앞에 커다란 벽이 존재하고 있지만, 정의는 우리 편이기에 맞서 싸워 이겨낼 것이다. 

 

5월 18일 그날의 광주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청년 박종철 열사

"몹시 추웠던 그해 겨울, 광화문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무력 충돌 없이 촛불을 들 수 있었던 건, 선배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옥중편지

 

이 땅이 아름다운 꽃으로 덮이리라 누가 믿었던가 / 이 땅이 희망의 노래로 가득하리라 누가 믿었던가 / 자유와 민주의 꽃으로 덮이리라 / 아무도 믿지 못하던 그 어둠 속에서 / 평화와 풍요의 노래로 가득하리라 / 아무도 믿지 못하던 그 두려움 속에서 - 그 유월의 함성, 그 유월의 어깨동무로, 신경림

 

이렇게 찜찜하고 개운하지 못한 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관람 이후로 오랜만이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한강, 최근에 읽은 남산의 부장들까지 대관절 권력이란 뭘까? 그 맛을 알게 되면, 나도 그네들처럼 변할까나.

 

건물 뒷편에 있는 공간인데 영화 1987에 나왔던 곳이 아닐까 싶다. 지하철을 타고 남영역을 지날때마다 이곳을 지나쳤을텐데, 높다란 가림벽땜에 그동안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거 같다. 

 

5층 창문은 머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좁고 길게 설계되었고, 두꺼운 입구 철문은 눈을 가린 채 끌려오면 여닫는 소리가 탱크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검은 벽돌의 외관부터 나선형계단, 엘리베이터, 5층 공간에 창문까지 이런 건물은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광주를, 광주의 봄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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