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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보다는 아픔이 그리고 무서움이 파도가 되어 밀려올 줄 뻔히 알기에, 시작 버튼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봐야지 봐야지 머리로는 되뇌이면서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 알고 있는 역사이니 그냥 넘기라고 말하는 나와, 역사 덕후라면 자세히 알아야지 어서 봐라고 말하는 나. 전날부터 3월 1일 아침까지 계속 싸웠다. 그래서 합의점을 봤다. '우선은 보자. 그러다 견디기 힘들면 중간에 멈추자.'

 

결론은 엔딩크레딧까지 봤다. 견디기 힘든 장면이 영화내내 나왔지만, 멈출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면 안됐다. 왜냐하면 대충이 아니라 아예 몰랐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3.1 만세운동을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오게 됐고, 출소를 이틀 앞두고 돌아가셨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내가 너무 미웠다. 감옥에 있던 1년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나였다면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면 조용히 살았을 거 같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펑펑 울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유?"라고 묻자, 유관순 열사는 "그럼 누가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후회는 너희들이 한다. 일본은 기필코 망한다."라고 무척 떨렸을텐데도 고문실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3.1만세운동이 1919년이고, 해방은 1945년 8월 15일이다. 26년,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세월이 절대 아니다. 고로 일본이 망할거라는 건, 엄청나고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면 흔들렸을 거다. 더구나 감옥에 있다면 더더욱 그랬을 거 같다. 

 

그런 곳에서도 유관순 열사는 절대 신념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문실에 처음 들어갔을때,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손톱이 다 빠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내내 왜 저래야만 했을까? 그냥 다른 이들처럼 조용히 지냈더라면 1년 반만에 나올거고, 그때 다시 독립운동을 했어도 될텐데... 그러나 마지막 장면, 마지막 대사를 보고 난 후에야 이해가 됐다. "그럼 누가 합니까?"

 

을씨년스러운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왔을때 그녀는 용수를 쓰고 있었다. 용수란, 수감자 이송 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라고 한다. 그런데 왜 신발을 싣지 않았을까? 당연히 고무신정도는 신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들은 맨발로 나왔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맨발, 밖에서 노역을 할때는 나막신을 신었다. 

 

3.1만세운동 후 수감자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그정도일 줄은 몰랐다. 3평 남짓한 감방에 20명이 넘는 사람들은 앉지도 못하고 내내 서 있어야 했으며, 다리 부종을 막기 위해 탑돌이를 하듯 방을 돌아야 했다. 노래조차 부르지 못하게 했던 그곳에서 1920년 3월 1일 그녀는 다시 만세를 불렀다.

 

날짜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힘든 노역까지 하면서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곳은 격병장으로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격벽을 세운 이유는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사하기 위해서다.

 

3.1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웃음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902년에 태어났으니, 3.1만세운동을 했을때 그녀 나이는 17세다. 열입곱 소녀에게 가해진 극악무도한 고문, 영화인데도 손톱이, 다리가, 배가 그리고 온몸 전체가 아파왔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감옥 밖 사람들에게로 전달되어 다시 퍼져나갔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는 거 같다. "그럼 누가 합니까?" 해방 후에도 여전히 친일세력이 득실댔지만, 이분들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국어는 일본어가 됐을지도 모른다. 고로 잊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가슴 깊이 새길 것이다.

 

고아성 배우

유관순은 구타로 인한 방광 및 자궁파열로 출소 이틀 전, 1920년 9월 28일 사망했다. 시신은 몰래 화장시키기 위해 석유통에 넣어졌으나 이 사실을 안 이화학당 측의 요구로 가까스로 인도된다.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유관순의 시신은 1939년 일제가 비행장을 그곳에 건설하며 결국 유실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9년 유관순을 고문한 혐의로 정춘영을 체포했으나 이승만정권에 의해 동 위원회가 강제해산 되면서 이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엔딩 자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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