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728x170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자랑스런 역사도 아니면서 굳이 역사관으로 만들 필요가 있냐고 되묻는 이가 있을까? 혹시나 만약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잊지 말아야할 우리 역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다.

 

2월 25일부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휴관됐다. 더불어 101주년 3.1절 기념행사도 취소가 됐다고 한다. 이래저래 우울한 3.1절을 맞이 해야할 거 같다. 이번(2월 22일)이 두번째 방문으로, 6년 만이다. 지금은 형무소도 아니고 역사관인데도 이 앞에 서면 맘이 무거워진다. 만약 그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았을까? 겉으로는 당연히 독립운동을 했을거라 말하지만, 속마음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태극기를 보자 또 울컥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었다고 한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 순국했고,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뤘던 곳이다.

 

전시관(보안과청사)

성인은 3,000원으로 입장료가 있다. 결제를 하고 전시관에 들어가니, 열감지카메라가 있다. 3일 후 휴관이 될지 모르고, 혹시나 열이 나면 어쩌나 살짝 쫄았는데 다행히 입장이 가능했다. 

 

전시관 1층 형무소역사실

개소 당시 1,600㎡의 규모였던 서대문형무소는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1930년대에는 51,200㎡로 약 30여 배 이상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는 독립운동에 따른 소위 사상범의 급증때문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해 한국민을 감금하고 탄압할 시설이 필요했다. 이에 8개 주요 도시에 본감옥과 분감옥을 설치해 전국에 16개소 감옥을 설치, 운영했다. 강제병합 직후 21개소, 1920년 이후에는 평균 30여개소 내외의 감옥이 생겼다.

 

전시관 2층 민족저항실

1910~194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 동안 의열투쟁, 비밀결사 조직, 해외 독립군 기지 창건, 독립군 양성, 3.1독립만세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6.10만세운동, 대일 무력투쟁 및 사회 문화 노동 농민 학생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일제는 200년 동안 우리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정말 그렇게 됐다면 지금도...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수감자 노역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에 채웠던 형구로 요라고 한다. 보기에도 묵직한데, 무게는 5kg, 길이는 3m다. 그리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태극기 목각판이다.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

독립운동가의 기록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5천여 장의 수형기록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되새겨 보는 공간이다. 6년 전에도 울컥했는데, 역시나 변함이 없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고 깊이 새기겠습니다."

 

전시관 지하 즉, 보안과청사 지하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던 공간이다. 각 방은 취조실과 임시구금실, 독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 전에는 직접 내려가서 봤지만, 이번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 충격이 계단 앞에 서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아픈데, 그분들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상상을 한다해도 실상은 그 이상일 거 같다.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해 앉을 수도 움직일수도 없는 고통을 준 벽관 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 넣어 마구 흔들며 못에 찔리게 해 고통을 준 상자고문. (6년전에 찍은 사진 재활용)

 

2020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월 정용기ㅣ / 2월 조지 새넌 맥큔 / 3월 김세환 / 4월 오광선 정현숙 / 5월 유찬희 / 6월 임병극 / 7월 강혜원 / 8월 이석영 / 9월 채원개 / 10월 박영희 / 11월 유도발 유신영 / 12월 윤창하

 

중앙사에서 바라본 10 11 12 옥사

3.1운동으로 잡혀 온 수감자가 갑자기 늘어나 1920년대 초에 새로 지은 2층 옥사다. 수감자 감시와 통제를 쉽게 하려고 원형 감옥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다. 복도 천장의 채광창은 수감자의 움직임을 잘 보기 위해 만든거란다.

 

12옥사에는 먹방이라는 독방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약 0.7평의 공간으로 내부는 24시간 내내 빛이 한줌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먹물처럼 깜깜하다 해서 먹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진 속 공간은 요즘 말로 하면 혼거실이지 않을까 싶다. 

 

11옥사 외관
11옥사 내부
공작사

수감자들이 노역했던 건물로 주로 옷감과 실, 의복 등 의류품을 만들어 전국 각지의 형무소나 군부대, 관공서에 공급했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2009년에 발굴한 서울구치소 재소자들이 사용하던 밥그릇이다.

 

내부는 촬영이 금지된 곳, 사형장이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사형장은 5m 높이와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 사형장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는 끌려가는 사형수들이 원통한 마음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전해진다. 사형장 안쪽에도 같은 시기에 심었다는 미루나무가 한 그루 더 있었는데, 억울한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 나무를 죽어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구치감 여옥사

여옥사 8호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유관순과 함께 8호 감방에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개성지역 3.1운동을 지도한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수원지역 3.1운동을 지도한 김향화, 파주지역 3.1운동을 지도한 구세군 사령 부인 임명애 등의 인사들이었다. 

 

박진홍(좌)과 이효정(우)은 동덕여고 동기생으로 일선 공장의 노동운동을 주도하다, 각각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서로 소식을 모른 채 여옥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박진홍은 임신한 상태로 수감되었고, 출산을 했지만 아기는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1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작년에 개봉을 했는데 아직 못봤다. 영화 시작부터 펑펑 울 거 같아 미뤘는데, 3.1절을 맞아 나만의 기념식으로 영화를 봐야겠다. 그리고 다시한번 다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고로 "잊지 않겠습니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