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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아픈 제주 4.3  

누구 덕에 많이 이들이 알게 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일을 했다면, 그랬다면, 제주의 아픔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제주 4·3 70주년에 맞춰, 제주도에 다녀왔다. 그때는 네00에서 놀던 때라 일년이 지난 오늘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백업파일을 뒤적였다.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꽃이다. 4.3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쓰러져 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해방이 되어, 일제는 사라졌지만 친일파는 여전했다. 일본이 간 자리에 미군이 들어오자, 그네들은 친미파가 됐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이 3년간 다스렸던 이때, 제주는 내륙과 달리 친일세력이 약했다. 내륙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민위원회가 소멸되어 갔지만, 결속력이 강했던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건재했다. 즉,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자, 유일한 정부였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 눈이 녹지 않았던 2018년 3월의 제주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평화기념관에는 누워있는 하얀 비석이 있다.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뜻한다. 이름을 짓지 못할 만큼 슬프도록 아픈 역사라는 사실에 울컥과 뭉클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3.3평 유치장에 35명 수감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인 1947년 3월 1일에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 무장을 하지 않았고 경찰의 과잉대응이었다. 왜냐하면 사망자 대부분이 등에 총을 맞았기 때문이다. 사망자 6명 중 한 명은 아기를 업은 여성이었고, 나머지는 학생과 구경꾼들이었다. 이날 이후 전도민이 참가한 총파업이 일어났지만, 미군정은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였다.

이때 서북청년회가 등장하게 된다. 응원경찰대로 제주도에 들어왔는데 급료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약탈로 일삼았으며, 빨갱이 섬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제주도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불바다가 된 중산간 마을

남쪽만의 단독 선거인 5.10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시점에 남로당 제주도당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날 이후 잠시 평화협상이 있었지만, 곧이어 미군정의 방해공작이 시작됐다. 오라동 연미 마을에 방화가 일어났고, 평화협상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했다. 

제주도민은 5.10 선거를 거부하게 되면서,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 1948년 10월 17일 포고령이 내려졌고, 한 달 후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로써 중산간 마을은 대부분 불사라 버렸고 여성, 어린이, 노약자도 예외 없이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사살해 버렸다. 즉,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가 되었다. 무장대는 불과 500명 정도였다는데,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 명, 도민의 1/9를 희생시켰다. 이중 33%가 노약자와 여성이었다고 한다.

 

4.3 위령제단
행방불명인 표식

국가가 자행한 사건 중 제주4.3이 가장 늦게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이날 만났던 현지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주에서 4.3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다." 위폐 봉안소에는 13,903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행방불명인 표식은 희생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는 행방불명인을 대상으로 특별히 개인 표석을 설치해 넋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불바다가 된 중산간 마을은 흔적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무등이왓 마을은 5개 부락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 130호가 있었다.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던 주민들은 하나둘 토벌대에 희생되면서 마을은 사라졌다.

 

무등이왓 마을은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지금은 휑한 공터일 뿐이지만, 이곳에는 집이 있었다. 그런데 집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주변에 대나무가 있어서다. 왜냐하면 마을 주민들은 대나무를 이용해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마을도, 집도, 사람도 현재는 아무도 없다.

 

잠복학살터

토벌대가 동광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강제이주시키고, 해변마을에는 주민감시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무장대의 은신처와 보급처를 없앤다는 소개력을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은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당했다. 덜 맞아 육신이 온전했던 사람은 도망을 쳤지만, 나머지는 모두 총살을 당했다. 토벌대는 자신들이 학살한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잠복을 했다. 김두백 등 일가족 10여 명을 한 곳으로 몰이해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질렀다. 

 

변함없이 피는 동백꽃과 달리 마을은 사라져버렸다. 잃어버린 마을은 무등이왓 마을만이 아니다. 곤을동, 리생이, 영남동, 자리왓, 삼밧구석, 하늬골 마을 등이 있다.

 

영화 지슬의 촬영지로 알려진 동광 큰 넓궤로 가는 중
나무 밑 작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180m 길이의 굴로 당시 120여명이 숨어 살았다

동광 큰 넓궤는 소개령을 피해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야산과 달리 험했지만 넓었고, 사람들이 숨어 살기 좋았다고 한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주로 살았고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숨어 토벌대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해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 등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었지만, 동굴트라우마가 있어 포기했다.

은신생활은 60여 일만에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영화 지슬 후반부에도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토벌대가 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이불솜 등에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은신처가 발각됐으니 주민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끝내 토벌대에게 들켜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정방폭포 부근에서 학살됐다.

 

그동안 내가 봤던 제주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늘 이런 모습만 봤는데.. / 동알오름에서 바라본 제주.
셋알오름 알제고사포진지

다크투어리즘은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이다. 셋알오름의 일제 고산포진지는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이다.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축됐으며, 일본군의 군사시설의 하나로 태평양 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섯알오름 학살터 위에서 총을 쏘면 웅덩이로 사람이 툭툭 떨어졌다.
위령제단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제주 4.3 당시 양민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은 시간 간격을 두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기에,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가 만들어졌다.

 

봄이 왔다고 노란 유채꽃이 폈지만, 그날은 빨간 유채꽃이 폈을 거 같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을 대표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했다.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 비행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제주도민을 동원해 건설한 군용 비행장이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알뜨르에 출격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 비행장은 연습 비행장으로 남았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평곤의 파랑새

대학살 때 사용한 무기는 총으로, 200년 11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추가 발굴을 했는데 1,700점의 탄피가 발굴됐다고 한다. 차라리 영화이길 바라고 싶은데 팩트이자 역사다. 그러므로 잊지 않기 위해 더더욱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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