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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이발소 지금은 바버샵" 서울의 이용원 (in 서울역사박물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처럼, 남자는 이용원 여자는 미장원이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삼색등을 바라보면서, 내부가 매우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때의 아쉬움을 박물관에서 풀어본다.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서울의 이용원"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에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하는 기획전은 가능한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서울의 이용원은 기획전인 듯 특별전 같은 전시라고 할까나? 로비에서 하는 작은 전시회다. 시민들과 소통했던 서울의 이용원 이야기를 통해 일상 공간의 과거와 오늘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고 안내문에 나와있다. 

동네에 있는 작은 규모의 이용업소는 이발소, 도시 중심에 있는 큰 규모의 이용업소는 이발관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데, 그럼 미장원과 미용실은???

 

이용원의 역사는 1895년에 내려진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됐다. 일본인을 중심으로 진고개 부근에 생겼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상당수가 개업하면서 점차 보편화되었다. 단발령 초기에는 머리를 깎으러 와서 통곡하거나, 완고한 아버지가 쫓아와 반만 깎은 머리를 붙들고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용원이 공존했다. 이용 요금이 각각 달랐다고 하는데, 일본인 이용원은 20~25전, 조선인 이용원은 15전 그리고 중국인 이용원은 조선인보다 저렴했다.

예나 지금이나 저렴한 곳으로 사람이 몰리는 법. 손님들은 값싼 조선인, 중국인 이용원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요금 인화 조치가 이뤄졌다.

 

광복 이후 이·미용업은 전국 이용사 총연합회와 대한미용협회가 각각 1946년과 1957년에 창립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 특히, 이용업은 1960~80년대 초에 가장 성행했다. 사회적으로 장발 단속이 심했고, 많은 학생들이 두발 규정에 따라 이용원에서 머리를 짧게 잘랐기 때문이다.

 

구내 이용원은 큰 건물이나 시설 안에 있는 이용원으로 기관 이용원으로도 불렀다. 서울의 구내 이용원이 보편화된 것은 1950년대 후반 전후 복구 사업을 거치며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교내 이용원은 두발 자유화가 되기 전 규울이 엄격했던 고등학교와 장발 단속의 주된 대상인 대학생들이 있는 대학교에 있었다.

 

1970년대 공중목욕탕의 이용업이 법적으로 허가되고, 목욕탕의 고급화 대형화가 이루어지면서 목욕탕 내에서도 이용원을 운영했다.

 

미용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
이발보다는 면도가 하고 싶었다!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왼쪽부터 순서대로 이발가위, 숱 치는 가위, 머리카락 떨이개, 전통이발기 그리고 면도칼이다.

 

이용원과 미장원의 가장 큰 차이라면 머리 감기가 아닐까 싶다. 여자는 앉은 자세에서 머리를 젖히면 되는데, 남자는 머리를 숙여야 했다.

 

효자동이발소 물뿌리개 (이런 도구가 왜 필요했을까?)
왠지 모르게 정겹다!
중구 방산동 맘모이발관 (1962.9.27)
이용원의 물건들


미래유산이 된 이용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용원은 문화이용원과 성우이용원(2013년) 그리고 미일이발관(2023년)이 있다. 이곳은 서울 시민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소통하며 전통 방식의 이용 문화를 간직한 곳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문화이용원은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7에 있어요~

문화이용원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처음 문화이용원을 개업한 이용사는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전해질뿐이다. 

두 번째로 문화이용원을 이용한 이상기 이용사는 한국전쟁 후 간판만 남아있던 이용원에 들어가 영업을 시작했다. 세 번째로 문화이용원을 운영한 지덕용 이용사는 1959년부터 보조원으로 있으면서 일을 배웠다. 군 제대 후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5년간 일하다가, 이상기 이용사가 연로하자 이용원을 인수했다.

 

성우이용원은 서울시 마포구 효창원로 97길 4-1에 있어요~

1대 서재덕 이용사는 숙명여대 부근에 오복이발관을 개업했다. 2대 이성순 이용사는 장인으로부터 이용원을 물려받은 후, 상호를 성우이발관으로 바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을 이발해 주고 요금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3대 이남열 이용사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62년에 처음 이용원 일을 시작했다. 1970년 이용사 면허시험에 합격하면서 이용원을 물려받았다.

 

이용원에서 바버샵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스타일을 제공하는 한편, 부가적인 서비스는 전성기 시절 이용원의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이용원의 이미지를 쇄신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용원에서 바버샵으로 세대교체를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장 큰 적(?)은 미용실이 아닐까 싶다. 이용원을 가기에는 거시기(?)하고, 바버샵은 너무 고가라 부담이 되니깐. 메인은 아니었지만, 콘텐츠 하나를 만들어줬으니 서울의 이용원 베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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