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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만난 원서동 빨래터 & 백홍범가옥 

고희동 화백 가옥 & 미술관을 가기 전에 갈만한 곳을 찾아보니 특이하게도 원서동 빨래터가 나온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했는데, 진짜 있다. 역할은 끝이 났지만, 물이 흐르고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언덕배기에서 만난 백홍범가옥과 누군가의 별장 등 원서동을 걷다.

 

고희동 화백 가옥을 다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가 좌회전을 한다. 참, 원서는 창덕궁 후원의 서쪽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들이 집성촌을 이루던 곳이라고 한다. 

 

원서동빨래터를 향해 가던 중, 주차장 넘어 보이는 으리으리한 한옥에 자동적으로 발길이 멈췄다. 저기가 원서동백홍범가옥인가 했다. 예전에 상궁이 살았던 집이라고 했는데, 돈이 많은 상궁이었나? 집이 꽤나 크다. 실제로 저곳은... 잠시 후에 공개합니다~

 

원서동 빨래터는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30에 있어요~

원서동빨래터는 창덕궁 신선원전의 외삼문 우측 궁상 아래로 흐르는 소하천에 마련된 빨래터이다. 궁내의 물이 궁궐담장을 통해 바깥으로 흐르는 곳에 평교형식의 2칸의 다리 길이 너비 약 1.5m 규모를 설치한 다음, 그 위에 궁장(궁궐을 둘러싼 성벽)을 연결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이곳 빨래터로 통하는 물은 궁내의 풍부한 수원으로 인해 사시사철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흘렸다. 또한 위치가 궁궐과의 경계인 담장 아래여서 궁궐의 궁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다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빨래는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전히 물은 흐르고 수질은 꽤나 맑아 보인다. 

 

조선시대 도성내에는 이름난 빨래터가 여러 곳 있었다. 한양 도성에는 3대 빨래터가 있었는데, 원서동과 삼청동 그리고 청계천 빨래터이다. 그중 원서동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창덕궁 외삼문은 출입금지구역
태재재단이자 태재대학교
한옥인데 왜이리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빨래터에서 왼쪽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백홍범가옥이 나와야 하는데, 으리으리한 한옥 대문이 나타났다. 여기는 또 어디인가? 저기 나와있는 문패(?)를 보니 태재재단이라 적혀있다. 백홍범가옥이 먼저이니,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또 잠시 후에...

 

백홍범가옥일까? 아닐까?

아까 주차장에서 봤던 원서동 백홍범가옥에 도착했다. 문이 닫혀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주차된 차가 많아서 촬영도 불편하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담았는데, 잘못 찾아왔다.

이곳은 백홍범가옥이 아니라 누군가의 별장이라고 한다. 팩트체크는 못했지만 전언에 따르면, ㄴㅅ 회장의 별장으로 460억이 넘는다고 한다. 상궁이 살았던 가옥치고는 너무 으리으리하다 했더니, 역시 돈 많은 사람이 주인이었다.

 

별장이라고 알려준 사람은 이곳은 관리하는 직원이다. 사실 백홍범가옥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내려오면서, 여기도 독특하니 사진이나 찍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순찰을 하고 있는 직원을 만났고, 그에게 촬영 협조를 구해자, 마당까지는 들어와도 된단다.

사진을 찍으면서 건물이 너무 독특하다 했더니, 예전에는 한샘디자인박물관이었는데, 지금은 태재대학교라고 알려줬다. 이런 곳에 대학교가 있네요 했더니, 인터넷 강의를 주로 한단다. 그래서 사이버대학인가요 했더니, 미국에 있는 미네르바대학교과 비슷하단다. 굳이 더 알고 싶지 않아서 질문은 여기서 끝냈다.

 

찾았다 백홍범가옥

직원분과 얘기를 하던 중, 저 위에 있는 백홍범가옥이 무지 으리으리하네요 했더니, 거기는 누군가의 별장이라면서, 여기가 백홍범가옥이라고 알려줬다.

1910년에 지어진 백홍범가옥은 상궁이 살던 집으로 전해진다. 고희동가옥처럼 누구누구의 가옥이라고 하면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백홍범가옥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소유주 이름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집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한옥과 1930년대 이후의 집장사 집사이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당시 새로 도입된 근대적인 건축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고, 옆 건물에서 연구소로 사용하고 있어 내부는 커녕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창덕궁 외삼문.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신선원전이 나온다. 1921년 건립된 신선원전은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는 조선 국왕 12명의 어진를 모신 진전으로 이전에 세원진 선원전과 구분하기 위해 앞에 신()자를 붙였다.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고,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해진다. 무지 아쉬운 점은 출입금지구역이라서 직접 볼 수 없다는 거다. 바로 옆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신선원전이 보인다는데, 기회가 되면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

 

다시 원서동빨래터에서 고희동가옥을 지나 창덕궁이 잘 보이는 북촌1경까지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낮에는 겉옷이 불편할 정도로 덥지만, 아직은 밖으로 나가기 좋은 봄날이 계속되고 있다. 북촌 한옥마을은 자주 왔다 했는데, 여전히 낯선 곳이 많다. 고로, 더 더워지기 전에 밖으로 나가버리고~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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