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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

역사적 그날, 우리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독립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이방인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에 담아 해외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그리고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즈에 '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을 말한다' 보도를 있게 한 주인공은 형 앨버트 테일러와 동생 윌리엄 테일러 형제다.

독일기자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캐나다 선교사는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있는 기념관에서 그리고 앨버트 테일러는 기쁜 마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딜쿠샤(Dilkusha)에서 만날 수 있다.

 

딜쿠샤는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에 있어요~

딜쿠샤는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으로 메모를 해뒀지만, 정확한 위치는 잘 몰랐다. 독립문 영천시장을 뻔질나게 다니면서, 거기서 멀지 않은 사직터널 부근에 가옥이 있다는 거, 이제야 알았다. 사직터널로 진입하기 전에 가옥이 잘 보이던데,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

 

딜쿠샤 정초석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 지은 집이다. 딜쿠샤가 중요한 이유는, 앨버트 테일러는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 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해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1942년 부부가 떠난 후,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그러던 중 2006년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해, 2021년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이 됐다.

 

1층 공간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거실 벽면은 한국의 습한 장미철을 대비해 벽지대신 페인트로 칠했고, 뒤쪽 벽에는 벽난로가 있는 넓고 싶을 잉글누크를 만들었다. 벽난로의 양쪽에는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를 두었고, 계단 옆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다.

 

곳곳에 고가구가 많은 이유는 2층에 가면 알 수 있어요~
거실 옆 동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

1층 동쪽 공간에는 커다란 벽난로와 화로가 있는 식당이 있고, 주방은 뒤쪽에 있었다. 식당에는 창문이 여러 개 있어 딜쿠샤로 올라오는 진입로와 은행나무가 잘 보였고, 햇빛도 매우 잘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종합하면 '선남선녀'

둘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났는데, 앨버트는 준설기를 구입하기 위해, 메리는 동양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연극공연을 하던 중이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남자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신혼여행 사진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둘은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했고, 1917년 6월 인도 봄베이의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딜쿠샤 사진앨범
딜쿠샤 화재기사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기쁜 마음)라는 이름을 붙였다. 1923년 착공해 1924년에 완공된 딜쿠샤는 마음 사람들이 신성한게 여기는 은행나무와 까치샘이 있는 곳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공사 초기 주민들의 심한 반대를 부딪히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26년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거실을 지나 계단 뒤로 보이는 서쪽 공간으로 갑니다~

1층 서쪽 공간에는 두 개의 큰 방과 화장실, 옷방이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들 브루스의 놀이방으로 쓰다가 이후에는 손님들을 위한 방으로 사용했다. 여기는 첫번째 방으로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벽난로와 메리 테일러가 직접 그린 초상화와 한국 풍경
음첨골 쇄광기 그림

앨버트 테일러의 아버지 조시 알렉산더 테일러는 미국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광산 기술자 중 한 명이었다. 앨버트와 그의 동생 윌리엄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이듬해인 1897년 조선에 입국했다. 앨버트는 운산금광과 직산금광 그리고 음첨골금광을 경영하면서, 동생과 함께 테일러 상회를 운영하면서 한국에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1층 서쪽 두번째 방은 딜쿠샤로의 귀향
온돌을 몰라서 방마다 벽난로를 설치한 듯~
약 두 달만에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도착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했다. 앨버트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사우어하우스에 구금되었고, 메리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후,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다시 한국으로 오고 싶었지만,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된다.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그해 9월 인천으로 입국, 마음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바랐던 앨버트는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아버지 옆에 묻혔다. 

 

메리 테일러의 회고록 호박 목걸이 / 제니퍼 테일러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 딜쿠샤를 방문했는데, 1940년 한국을 떠난 지 66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후, 딸 제니퍼는 테일러 가문의 자료 1,026건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고, 이로써 테일러 일가의 한국에서의 이야기와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 제니퍼 L.테일러는 2021년 삼일절 102주년 기념식에서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낭독한 인물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먼 옛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쓴 미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2층 거실

딜쿠샤의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앨버트가 수집한 고려창자들이 놓였고, 그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 모형들이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주칠원반으로 궁중에서 사용했던 반상으로, 복원하는 중에 구매가 어려워서 제작을 했다고 한다. 상판은 튼튼한 은행나무를 사용해 가장자리가 살짝 들린 형태로 했고, 원통형의 다리는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이어 붙인 후 각진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만들었다.

 

2층 동쪽

2층 동쪽 공간은 앨버트 테일러가 쓰던 서재와 화장실, 옷방이 있는 침실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오른쪽 공간으로 딜쿠샤의 복원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2018년 11월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해, 2020년 12월 복원을 완료했다. 내부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했으며,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서 생활하던 모습과 앨버트의 언론활동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조성해 2021년 3월에 개관했다.

 

복원하는 과정을 영상과 사진으로~

딜쿠샤는 두 겹으로 벽체를 쌓는 일반적인 공동벽 쌓기에서 더 나아가 세 겹으로 벽체를 두껍게 쌓는 공동벽 쌓기를 적용했다. 두 겹에 비해 구조적 안정성과 단열, 보온 등의 측면에서 더 높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공동벽 쌓기는 미국 등의 지역에서 소규모 주택, 창고 등에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딜쿠샤는 기본적으로 서양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졌지만, 당시 국내 환경과 여건을 고려해 건축되었으며, 1920~30년대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현존 사례이다. 참, 딜쿠샤 주변에 한국인 집사가 사는 부속 건물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2층 동쪽 왼쪽 방은 기획전시실

테일러골동품점과 테일러상회는 앨버트와 윌리엄 형제가 함께 운영을 했다. 테일러공동품에서는 경성의 외국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한국의 고미술품을 판매하고, 테일러상회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열광했던 화려한 외제 수입품을 판매했다. 

 

1910~40년대 신문, 잡지 광고에 등장했던 테일러상회
테일러빌딩과 그 일대의 모습
테일러골동품점 외관

테일러상회는 191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동차 영업을 시작한 곳이다. 테일러상회가 이상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있는 돈의문구락부에 조선의 자동차 딜러로 윌리엄 테일러를 본 적이 있다.

 

주칠원반처럼 자수화조도병풍도 제작

2층 동쪽은 앨버트의 서재와 침실이, 서쪽은 메리의 작업실과 침실이 있었다. 서쪽 첫번째 방은 AP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앨버트가 직접 찍은 고종 국장 행렬 사진
뉴욕타임즈 기사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 바로 세브란스병원이다. 3월 1일에 배포를 하기 전에 일본 순사에게 들킬까 봐, 외국인이자 겁나 부자였던 메리 테일러의 침상 속에 숨겼다. 

한글을 알고 있던 앨버트는 침대 속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보고 기미독립선언서임을 알게 된다. AP통신원이었던 앨버트는 독립선언서를 동생 윌리엄에게 주고,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져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왜 일본일까?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해서 외국공관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빨간 박스 기사 원문 해석-  3월 12일, 서울(AP통신)
조선의 독립선언서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2천만 명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우리는 비열한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사천 삼백 년 역사를 가진 분명한 자치국이다. 세계 재건의 원칙에 발맞춰 우리 국민의 특성을 자유롭고 영원히 계발할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 선언서는 "조선인의 의무는 독립을 이루어 상처를 지우고 현재의 고통을 끝내며 일본의 부당한 정권 아래 오랫동안 억압당해온 민족 혼과 정기를 각성시켜 우리의 자손들에게 쓰라리고 부끄러운 유산 대신 영원한 자유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언서에서는 조선인들은 일본에 복수할 의도가 없고 일본 국민 모두가 아니라 일본의 소수 정치인들이 낡은 시대의 침략주의 정책으로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주장한다.

 

2층 서쪽에 있는 마지막 방은 영상실로 딜쿠샤를 돌아다니면서 봤던 모든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화면은 뉴욕타임즈 기사 제목으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다"

푸른 눈의 이방인도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탰는데, 그로부터 105년이 지난 2024년 그분들이 하늘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봤을까 겁이 난다. 곧, 앨버트 L. 테일러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드리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가야겠다.

■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
관람시간: 화~일요일 / 9:00~18:00
휴관일: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관람료: 무료
자유관람은 예약없이 방문가능, 전시해설일 경우 온라인 사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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