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그리며 | 효창공원 의열사와 심의사·백범김구·임정요인 묘역
1919년 3월 1일 그리고 2024년 3월 1일, 105년이 흘렸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날의 함성을 같이 울부짖고 싶다. 그리고 성능이 겁나 좋은 총과 폭탄을 갖고 가서 안중근·윤봉길·이봉창 의사에게 전달할 거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효창공원으로 달려간다. "그때 그 사람이 바로 나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헛소리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1919년 2월 28일에 가서 유관순 언니를 꼭 지켜드리고 싶다.
지금은 효창공원이지만 예전에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곳이다. 누가 공원으로 만들었을까?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 병력이 효창원 앞 송림 안에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뒤 경성부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 같은 해 8월부터는 순환도로와 공중화장실 등을 설치해 일반인의 이용을 허용했다. 문효세자의 묘를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2015년에 왔을때는 묘역을 멀리서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시개방(2016년 5월)으로 누구나 이곳을 찾을 수 있다. 아~ 1년만 늦게 왔더라면, 아니다. 상시개방 소식을 듣고 바로 왔어야 했는데, 9년은 너무 했다. 삼의사묘역을 시작으로 백범김구묘역을 지나 효창공원 의열사에 들리고 마지막은 임정요인묘역이다.
삼의사 묘역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삼의사인데 무덤은 총 4개가 있다. 3기의 무덤에는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 백정기의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빈묘는 다 알고 있듯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사의 임시 무덤이다.
표지석만 있었는데 지난 정부때 묘비를 설치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던데, 이러다 영영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왼쪽부터,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의사, 상해 홍구공원에 모인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사 그리고 일본 시설문 파괴공작과 요인암살 친일파 숙청에 투신해 항일운동에 전념한 백정기의사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묘소를 참배하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 더 할 수 있을까? 2024년을 살고 있는 나는 고맙고 죄송할 뿐이다.
2015년에는 묘역을 개방하지 않아서, 저기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 창문을 통해서 바라봤다.
백범김구 선생이 만든 한인애국단은 자기 목숨을 내건 사람들만 들어갈 수 비밀조직으로, 단원들의 정확한 인원과 명단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당시 일제의 정보기관은 80여 명 정도로 추정했으며, 그 핵심단원은 10여 명으로 파악했다. 단장은 백범김구, 단원은 안공근, 김동우(본명 노종균), 김해산, 엄항섭, 김홍일, 안경근, 손창도, 김의한, 백정기, 김현구, 손두환, 주엽, 양동호, 이덕주, 유진만, 윤봉길, 유상근, 최홍식, 이수봉, 이성원, 이성발, 왕종호, 이국혁, 노태영, 김긍호, 김철 그리고 제1호 단원 이봉창이다.
의열사는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해 1990년에 준공했고, 그 이듬해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묘역처럼 의열사도 2016년 5월부터 상시개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7인의 영정과 위패였는데, 이제는 8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열사라고 해야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중략)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최후 유언이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전 자신을 데리러 온 간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꼭 찾아서 대한민국으로 모셔와야 한다. 경향신문 2023년 5월 24일 기사를 보면, 유력한 장소를 확인했지만 발굴 작업 재추진은 쉽지 않다고 한다. 정부가 모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데...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니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한인애국단 앞 이봉창"
조성환 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만주 북로 군정서에서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군 창설과 활동에 크게 기여했으며,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독립 촉성회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이동녕 선생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과 언론 계몽운동 및 을사늑약 운동 등을 전개했다.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고,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을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주석 등을 지냈다. 1940년 중국 치장에서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차리석 선생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3·1 운동 때 만세 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활약했다. 임시정부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임정을 고수해 1935년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서장에 선출되어 활약했다.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오려던 중 중국 충칭에서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보란 듯이 잘 사는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초고속으로 후진 중인 듯싶다. 할 말은 참 많지만, 삼키려고 한다.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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