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2022년 3월 1일, 제103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보면서 드는 궁금증, 저 곳은 어디일까?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에 임시정부 기념관이 있나 했는데, 진짜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내려다 보이는 곳,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다.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한 곳이다. 대한민국의 건립과 민주공화정의 시작을 보여주는 곳이며, 우리 민족사의 자부심과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다.
2년 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갔을때, 언덕 위에 한창 공사 중인 곳이 있었다. 그때 그곳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었나 보다. 완공이 되면 가야지 했는데, 삼일절 기념식 방송을 보자마자는 아니고 며칠이 지난 후 찾았다.
상징광장에 있는 대형 조형물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상징기념 작품 "역사의 파도"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고, 일제에게 강탈된 주권과 국토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선열들의 고귀한 독립정신과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향후 계속될 미래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2층 군주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는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인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27년간 정부로서 활동한 과정을 담았다.
왕이 주인인 군주의 나라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민이 주인이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이 세워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키네틱아트이다. 민을 이루는 2백여 개의 볼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2백여 만 명의 한민족을 상징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에 국내외 곳곳에서 활동하던 대표급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나라를 새로 세우고 그 이름을 정했다. 대한제국을 잇는다는 뜻에서 대한을, 그러나 주권은 국민이 가진다는 의미에서 민국을 택해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았다. 대한민국을 연호로 삼아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1년)으로 적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 4월 수립할 때부터 14년(1932) 4월까지 13년 동안 프랑스 조계에 청사를 두고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감시와 수색,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여러 차례 청사를 옮겨야 했는데, 임시정부의 청사로 알려진 곳은 모두 12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창호가 미주에서 모금해 온 자금으로 프랑스 조계 샤페이로에 자리한 2층 붉은 양옥집에 청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
러시안 맥심 1910 중기관총은 하이람 스티븐슨 맥심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을 러시아가 1910년에 도입해 7.62×54mm 탄약을 사용하도록 개조한 중기관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외 동포에게 정부 활동과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고 독립의식을 드높이려고 펴낸 독립신문의 창간호다. 국내에도 몰래 들여와 영향을 주었고, 일본은 독립신문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법으로 규정해 탄압했다.
3층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회의 시초인 임시의정원의 의회 활동과 정당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임시정부를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1919. 4. 1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4조(1919. 9. 11.) 대한민국의 인민은 모두 평등하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3·1운동을 계기로 탄생해, 대한민국 원년(1919)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의정원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성립된 의회로 국가 이름과 연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가 운영의 기본 원칙을 밝힌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은 20대에 걸쳐 총 13명이 선출됐다. 초대 의장은 이동녕, 마지막 의장은 홍진이었다.
임시정부의 조직은 다섯 차례의 개헌을 통해 개편됐다. 대한민국 원년 수립 당시 국무총리제로 출발했으나, 9월 통합 정부를 구성하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었다. 이후 대한민국 7년(1925) 내각 책임제인 국무령제로, 9년(1927)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22년(1940)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전환했다. 대한민국 26년(1944)에는 제5차 개헌을 통해 주석 부주석제로 바꾸면서 좌우 통합 정부를 구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13년 동안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14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났다. 첫번째로 자리 잡은 곳은 항저우였는데, 김구를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자싱에서 생활했다. 임시정부는 17년(1935) 11월까지 항저우에서 머물다가 일본의 대대적인 추적을 피해 전장으로 이동한 뒤 난징을 중심으로 약 2년간 활동했다.
대한민국 19년(1937)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잠시 창사에 모여 생활하다가 20년 7월 광저우로 이동해 둥산바이위안에 정식 청사를 마련했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해 일본의 공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국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00여 명이나 되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이동 자금과 교통편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싼수이, 류저우 등을 거쳐 21년(1935) 5월 치장에 도착했다. 22년(1940) 9월에는 임시정부 요인 대부분이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해 27년(1945) 환국할 때까지 활동했다.
4층 임시정부에서 정부로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로부터 헌법과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와 국호·연호, 국가의 상징과 기념일 등을 이어받은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임시정부로서는 일본의 패망이 분명히 기쁜 소식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컸다. 임시정부는 국제적 제약때문에 연합국 구성원으로 승인받지 못했으나, 국민들은 임시정부의 귀국을 고대하고 환영했다.
3번, 변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변화에 대응한다. 김구. / 4번, 그대와 함께 돌아가리. 홍진.
신국가는 신청년이 건립할 것이오, 신청년은 신이상이 단단하게 갖추어진 자를 의미함이라. 김원봉.
환국을 결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미국 정부와 협의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한민국 27년(1945)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귀국했고, 가족들과 직원들은 이듬해 귀국할 수 있었다.
12월 1일에 개최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 이어 12월 19일에는 15만 명이나 되는 국민이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일대)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를 열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부터 국호·연호, 국기, 국가 등 국가의 상징을 계승했다. 대한민국 30년(1948)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국호인 대한민국을 계승한 데 이어 관보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적으며 임시정부의 연호를 이어갔다. 현행 태극기와 애국가도 임시정부에서 이어온 것이다.
지금은 기념관에 역사관이 됐지만, 그때는 산이었고 형무소였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데, 그때는 어땠을까? 보란 듯이 잘사는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나라가 된 듯한데, 5년 동안 유지가 될까? 말까?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개관 특별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돌아오다 환국을 보기 위해서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재외혁명 동지에게> 정지용
백성과 나라가 / 이적에 팔리우고 / 국사에 사신이 / 오연히 않은 지 / 죽음보다 어두운 / 오호 삼십 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천천히 돌아오시니!
허물 벗기우고 / 외오 돌아섰던 / 산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 자휘 잃었던 물 /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환국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주요 문서는 13개 대형 가죽가방에 담겨 국내로 들어왔다. 대한민국 27년(1945) 11월 5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국무위원과 경위대원 등 29명은 수송기 2대로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1진 15명, 2진 22명으로 나뉘어 입국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뿌리가 대한민국에 임시정부에 있으며, 그 정통성이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었다. 조선은 군주의 나라였지만, 대한민국은 국민의 나라다. 고로 우리가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선조들은 36년을 버텼는데, 5년쯤이야 무지 질긴 껌을 씹으며 버텨야겠다.
2020.02.28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잊지 않고 깊이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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