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짜장면박물관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겁나 좋아했을 거다. 짜장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깐. 아무때나 먹을 수 있지만, 졸업, 이사 등 특별한 날에는 더더욱 짜장면이 먹고 싶다. 아는 게 힘이라고 했으니, 알고 먹으면 더 맛나겠지. 인천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이다.
짜장면 박물관이라니, 솔직히 박물관은 과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짜장면만큼 우리와 함께 한 음식도 없을 것이다. 어릴때는 특별한 날에만 먹었지만, 지금은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친숙한 음식이 됐다. 라면처럼 간편하게 끓어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짜장면을 먹고 싶을때는 중국집으로 가야 한다.
짜장면 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짜장면 테마박물관이다. 개항 이후 중국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인천 중구 청나라 조계지에 자리 잡으면서 탄생시킨 음식인 짜장면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은 옛 공화춘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중국풍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청관 지역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정착한 화교들이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초기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했다. 상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동순태, 동순동 등 거상들이 자리를 잡았고 중화루(대불호텔), 공화춘과 같은 유명한 중국 요릿집들이 개점하는 등 매우 번창했다.
광복 후 선린동으로 동명을 개정해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유지코자 했지만,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사회는 위축됐다. 하지만 1990년대 한중수교를 계기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890년대를 전후해 인천의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했는데, 대부분 산둥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다.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 보급이 시작됐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청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중국 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이때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이 탄생했다. 공화춘은 신해혁명 후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1912년에 문을 연 중국음식점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젓가락은 필수 식사도구다. 중국은 은나라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 젓가락은 큰 상의 중앙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긴형태이며, 기름진 음식을 집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뚝하게 생겼다. 재질은 주로 나무다.
일본도 재질은 나무이며, 작은 독상에 놓인 음식을 집기 용이한 짧은 형태의 젓가락으로, 국수와 해산물을 집기 편하도록 끝이 뾰족하게 생겼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젓가락은 금속재질이며, 중국과 일본의 중간크기이다. 김치와 채소 같은 음식을 집기 편하도록 납작하게 생겼다.
짜장면이 외식 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이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했다.
1960년대 15원, 1970년대 200원, 1980년대 800원, 1990년대 1300원, 2000년대 3000원, 2010년대 4500원. 짜장면의 대중화는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는 부담없는 가격때문이었을 거다. 요즈음 무슨무슨 짜장면이라고 해서 만원대가 넘기도 하지만, 짜장면은 여전히 서민들의 대표적인 외식 메뉴다.
1964년부터 1977년까지 10여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 장려운동은 대대로 이어온 쌀 중심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혼분식 장려 정책이 완화된 후, 보리 소비량은 급감했지만 밀 소비는 그대로 유지가 됐다. 제과, 제빵, 제면 등 밀을 활용한 업종은 빠르게 성장했다.
춘장과 밀가루는 짜장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다. 요즘 맥주 시장에도 진출을 했던데, 그래도 곰표하면 밀가루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 해결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띠고 대한제분이 창립됐다. 대한제분은 국내 식량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1960년대 말부터 국내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요즈음 짜장면을 담는 그릇이 다양해졌지만, 예전에는 살이 두툼하게 붙은 수더분한 사기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음식에 곱빼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짜장면이 아닐까 싶다. 곱빼기가 아니어도 국수는 배가 금방 꺼진다고 해서, 보통인데도 양이 많았다.
광복 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 음식은 신속 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고, 이와 함께 철가방의 역사가 시작됐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었지만 너무 무거운 데다가 넘친 음식물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생기는 위생 문제 때문에 오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뒤 플라스탁 철가방은 금형 비용이 비싸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알루미늄판과 함석판 같은 싼재료가 등장함에 따라 완벽한 철가방이 탄생하게 됐다.
철가방,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 속 디자인으로 선정됐다. 철가방이 선정된 이유는 알루미늄의 색상이 밝고 깨끗한데다가 단순하지만 구조적인 기능이 뛰어난데 있다. 더불어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을 쉽게 닦아낼 수 있는 편의성, 약간 찌그러져도 원상 복구가 쉬운 친근한 가변성도 돋보인다. 이러한 장점들로 철가방은 후세에 물려 줄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유산이 됐다. 아쉬운 점은 철가방을 만든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누군지 모른다.
라면에 비해 봉지 짜장면은 7~8개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많아도 겁나 많다. 1970년대는 전혀 모르겠고, 짜파게티가 80년대부터 있었다니 놀랍다. 2010년대를 장식할 짜장면에는 단독보다는 듀오가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짜파구리, 불닭게티 등등등.
웍이라 부르는 중국 프라이팬은 밑이 둥글고 아주 두꺼워서 불이 골고루 닿아 열을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팬을 흔들면서 재료를 높이 띄웠다가 받았다가 하는데, 이게 바로 식혔다가 익혔다가 하면서 겉과 속을 골고루 익히는 기술이다. 그래서 센불로 요리해도 음식이 타지 않는다.
수타면은 모든 면 음식의 기본으로 전국 어느 중국 음식점을 가도 면 음식을 주문하면 쿵쿵 소리부터 냈다. 그때는 수타면이 기본이라면, 지금은 기계면이 기본이 됐다. 밀가루로 만든 반죽은 수타로 면을 뽑고, 검은색을 내는 소스는 춘장이다. 여기에 양파, 대파, 호박, 돼지고기, 다진 생강과 마늘, 식용유, 청주, 간장, 굴소스, 설탕, 참기름, 물녹말이 들어간다.
한때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고 하면서, 자장면이라고 부르게 했다. 국어사전에는 짜장면과 자장면을 다 허용하던데, 자장면은 그만 포기했으면 좋겠다. 짜장면은 짜장면이니깐.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 점심은 무조건 짜장면이다.
2022.03.03 - 인천으로 떠나는 중국여행 한중문화관 & 화교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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