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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불호텔전시관

개항의 물결을 타고 외국에서 많은 이들이 조선땅을 밟았을 거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교통편이 형편없었기에, 인천항에 도착하자마자 한양으로 바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오니 숙박시설이 필요했을 테고, 주막이나 객주가 아닌 맞춤형으로 호텔을 지어야 했을 거다. 인천 개항누리길에 있는 대불호텔은 서양식으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그때는 대불호텔 지금은 대불호텔 전시관

서양식 호텔답게 외관은 서부영화에서 많이 본 듯하다.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을 착안해, 1887년경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건물을 짓기 시작해,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호텔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대불호텔은 새로 지은 건물로, 실제 건물은 1978년에 철거가 됐다. 대불호텔은 호텔에서 중화루 그리고 월세집을 지나 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통합관람권이 좀 더 저렴해~
1층 복도

제1전시실 유리바닥에는 대불호텔 터에서 발견되 유구를 볼 수 있다. 개항장의 숙박업을 주도하던 대불호텔은 경인철도 개통으로 쇠퇴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왜냐하면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노선이 경성까지 연장되면서 우마차를 타고 12시간 소요되던 거리가 1시간 40분 내외로 단축이 됐다. 인천항으로 들어온 외국 여행자들은 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이동할 수 있었기에, 인천에서 숙박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대불호텔의 사계절을 담은 영상 중 일부
1898년경 개항장 풍경 사진
중화루 간판

대불호텔이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은 후, 1918년경 뢰씨 일가를 비롯한 중국인들이 호텔을 인수해,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중화루라는 북경요리 전문점을 창업했다. 당시 인천에는 이미 몇 개의 중국 요리집이 성업 중이었지만, 중국풍 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웅장한 3층 벽돌 건물의 중화루는 개점과 동시에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크게 성업했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청관거리가 쇠퇴하면서 중화루도 경영난으로 폐업을 하게 됐고, 간판을 걸고 월세집으로 이용되가 결국 1978년에 건물은 철거가 됐다.

 

2층에 있는 제2전시실

조선시대 외국사신들이 머물던 관, 공무 여행자들의 숙박시설 원, 상인들의 숙박시설 객주와 여각 그리고 주막은 서민들의 대중적인 숙박시설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번째로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로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주 목적지는 인천이 아니라 경성(서울)이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는 철도가 없어서,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데 12시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교통수단이 열악했다. 오랜 항해를 마치고 제물포에 도착한 여행객들이 이 거리를 이동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인천에서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필요했다. 

 

초창기 대불호텔은 2층의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으나, 곧이어 3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신축하고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을 고객으로 맞아들였다. 

 

3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기와집 아사히야여관, 4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가옥 아사오카여관, 2층의 목조건물 스이쯔여관 그리고 대불호텔 길 건너편에 위치한 하나야여관 등 서양식 대불호텔과 달리 일본식으로 지은 여관도 많았다. 

 

개항 이후 조선에는 통신, 교통, 전기, 의료 등 서양의 근대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인천은 개항장이었던 만큼 이러한 근대 문물이 가장 빨리 도입될 수 있는 도시였다.

 

전신기 / 에릭슨 전화기
커피잔과 접시 세트 / 테이블웨어 세트
원두커피로스터 및 커피주전자 / 수동식 프라이팬형 로스터 / 커피메이커 세트

요즘 K-농산물이 역대급 수출을 하고 있지만,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커피를 비롯한 다양안 서양음식이 수입되고 유통되었다. 대불호텔은 서양식 호텔이었으니, 당연히 손님들에게 커피를 제공했을 거다.

 

객실재현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면, 반도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민간)호텔이다. 현재 을지로1가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은 일본인 노구찌에 의해 1937년에 개관했다. 반도호텔은 지하 1층, 지상 8층 건물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한 우리나라 최대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이다. 이 시기 호텔사업은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됐다.

 

제3전시실 연회장
영화 모던보이가 떠올라~
그때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대불호텔은 일본식 여관과는 달리 서양의 음료와 음식이 제공됐고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통용되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다. 다른 숙박시설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지만 외교관, 선교사, 조선 정부의 고위 관리, 외국군 장교 등이 주요 고객으로 방문하며 주변 숙박업소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다. 

 

가배차, 가비차, 양탕국, 가피차는 모두 커피를 부르는 이름이다. 커피는 1890년 전후 서양에서 국내로 들어왔다. 유길준의 서유견문(1889)에는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라고 나와있다. 더불어 남미국가에서 커피를 수출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에서는 수입하고 있다고 나와있다.

 

철도와 함께 호텔은 쇠락하고, 중화요리집이 됐지만 경영난으로 월세집을 전전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세기에는 시대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철거가 됐지만, 21세기에는 전시관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2층에 객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기는 하나, 좀 더 호텔스럽게 꾸며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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