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역행한 인물이 신사임당이라면, 그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은 인물이 있다. 그녀에게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남편에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이이같은 아들이 있었더라면, 27세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더 슬프게 느껴졌던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이다.
1551년 사임당은 하늘의 별이 되고, 그로부터 12년 후 1563년 오죽헌에서 4.2km 떨어진 초당동에 본관은 양천, 본명은 초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이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허엽, 오라버니는 허봉 그리고 남동생은 허균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문이다. 허엽은 회담 서경덕의 제자, 허봉은 미암 유희춘의 제자 그리고 허균은 유성룡과 이달에게 문장과 시를 배웠다.
여성의 이름을 그리 중요치 않던 시대에 호는 물론 이름까지 남아있다는 건, 아무래도 한류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이부분은 이따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먼저 다룰까 한다.
허초희는 명문가 집안답게 오라버니와 남동생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외모 또한 꽤 아름다웠다고 한다. 여기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여성이었지만, 남동생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에게 한시 수업도 받았다.
신동까지 들었지만, 사임당과 달리 허초희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사임당은 무남독녀라 부모가 그녀의 재능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신랑감을 찾았는데, 왜 초희 부모님은 그러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임당의 부모는 특별했고, 초희 부모님은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조선은 남존여비가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였다.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강력한 남성중심 사관과 함께 부계적 가족제도인 종법제도가 확립된 시기였다. 이 제도 아래 여성은 삼종지도라 해 남성들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허초희는 15세에 안동 김씨 성립과 결혼을 했지만,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이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보다는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이는 자신보다 시를 잘 짓고 아는 것이 많은 아내가 부담스러워서 사랑대신 질투와 미움을 줬단다. "못난눔~"
그 아들에 그 어머니인가요? 시어머니도 아들이 며느리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해 구박을 했다. 요즘 같았으면 바로 이혼각인데, 그때는 16세기 조선이다.
남편과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자식(1남 1녀)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이겨냈다. 더불어 시를 짓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18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로 일하던 중에 병을 얻어 상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녀에게 있어 전부라 할 수 있는 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말았다. 제발 여기서 멈췄야 하는데, 임신 중이던 배 속의 아이까지 유산을 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남편이라는 인간은 계속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복이 찾아와야 하건만, 그녀에게는 불행만 찾아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전라도를 여행하다 죽음을 맞이했고, 얼마 후 자신의 재능을 아꼈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가 멀리 귀양을 갔다. 남동생 허균 역시 귀양을 가는 비극이 이어졌다.
남편의 외도와 시어머니의 학대만으로도 충분히 힘들텐데, 자녀를 잃은 슬픔과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져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면 불우하게 살았다. 그리고 1589년 3월 19일 한양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녀 나이 27세).
허초희는 죽기 전 이런 한탄을 했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웠으며, 유언으로 친정에 있던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고 했다. 유언대로 따랐다면 16세기 BTS를 만날 수 없었을 거다.
남동생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유언을 따르기 위해 강릉 집에 갔다가, 다시 한번 누나의 시를 읽게 된다. 불태우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남아 있던 시와 자신이 기억하는 시를 정리해 '난설헌집'을 펴냈다.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허균을 만났고, 그를 통해 난설헌 허초희의 시를 알게 된다. 이 사신이 중국에 돌아가서 조선의 시를 소개한 조선시선을 펴냈는데, 수록된 시 중에서 유독 그녀의 시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606년 명나라 사신을 통해 난설헌집은 중국에서 대박이 났다.
이후 조선에 온 명 사신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시집을 구해달라고 했다. 명에 이어 청으로 나라는 바꿨지만, 그녀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시를 암송하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 황제 역시 그녀의 시집을 조선에서 구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중국을 정복(?)하고, 1711년 일본에서 난설헌집이 출판됐다. 예상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일본의 여성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살아있을 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슬픔만 찾아 오더니, 그녀가 죽고 난 후 BTS급 한류 스타가 됐다. 허초희가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며, 혼자 살거나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남자를 만났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너무 일찍 태어난 게 죄가 아닐까 싶다. 울컥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이라 더 울컥했다는 거, 안 비밀이다. "21세기에도 난설헌 허초희을 기억하는 사람, 여기 있어요~" 당신에게 나의 목소리가 전해지길 바래봅니다.
2023.10.24 - "유전이 중요해" 신사임당과 이이가 태어난 강원 강릉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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