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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백남준기념관

백남준기념관이라고 해서, 그의 생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가가 아닌 어릴때 살던 집이다. 또 그런데 진짜 살던 집은 아니고, 집터 근처에 있는 한옥을 매입해 백남준 기념관으로 도시재생을 한 거라고 한다. 복잡하지만 어찌됐든, 그가 살던 집터는 확실하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창신동에 있는 백남준기념관을 찾았다.

 

서울시 창신동 197번지에 있던 백남준의 집은 작가 본인에 의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그가 살던 큰 대문 집이 옛날 외무대신이 쓰던 집으로, 6·25때 폭격을 맞아 쪼가리만 남았다고 했다. 

1990년 백남준은 큰 대문 집이 있던 장소를 찾아가는 영상기록을 남겼다. 영상에는 도포를 차려입은 백남준이 지게에 지구본을 싣고 종로통을 지나 사라진 집터 앞에서 자신이 누이와 유치원 친구와 함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훗날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세기말II과 같은 백남준의 주요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서울시는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50년까지의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197번지 일대 집터에 위치한 한옥을 매입했고 이를 백남준기념관으로 조성했다. 

들어가는 입구조차 예사롭지 않다. 작품명 문-문-문으로 철제 대문을 중심으로 앞뒤에 빛의 문과 영상의 문을 설치해 3중의 문을 연출했다. 빛의 문은 조명 박스로, 영상의 문은 사각의 아치 모양으로 부착된 9개의 모니터로 제작됐다. 영상은 굿모닌 미스터 오웰과 34년 만에 귀국해 창신동을 찾아오는 그의 모습 그리고 오늘의 동대문, 창신동, 숭인동 풍경이다.

 

마당에 있는 웨이브(김상돈 작품)는 백남준의 거대한 빛의 탑인 다다익선의 형태를 취한 작품으로, TV대신 3천여 개의 투명 아크릴 조각을 사용했다. 

 

수월은 대야에 담긴 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루 천장에 물 그림자가 맺히는 현상을 관찰했던 백남준의 어린 시절 추억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김상돈 2017)이다. 놋대야 아래 거울, 유리, 조명을 설치해 과학과 예술, 공학의 영원한 원천인 빛과 상의 세계를 환기시킨다고 나와있다.

 

카페공간
전시공간

백남준 이야기는 그의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삶과 예술에 더욱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된 공간이다. 백남준의 주요 기억을 테마로 엮어서 말, 글, 작업, 지인들의 회고담을 읽으며,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는 창의적이며 수행적 노트라고 안내문에 나와있다.

 

백남준의 드로잉 일부
열차는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백남준에게 신기가 있었다? 스승 혹은 법사가 됐을 뻔~

백남준의 대표작품 다다익선이 다시 재가동 된다는 뉴스를 접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니라 과천에 있단다. 백남준기념관과 들렸다 바로 가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1003대 모니터탑을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싶다.

 

백남준의 거의 모든 것 - 백남준 버츄얼뮤지엄은 그의 연혁, 전시 경력, 작품, 어록 등 백남준의 예술과 생애에 관한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는 가상박물관이다. 

 

TV 수상기 앞에 앉아 리모컨이 아닌 다이얼을 돌리면, 782건의 자료와 425장의 이미지 데이터를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세계인이었던 백남준의 행보에는 128개의 도시 이름도 등장한다.

 

백남준의 세계는 선 불교 철학, 노자, 장자, 샤머니즘 등 동양의 고전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현대 기계문명을 인간화했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업적은 통신과학기술을 부정하기보다, 그것에서 감하고 통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하시킨 것이다. 테크노부처는 백남준의 역작으로 손꼽는 TV부처에 경의를 표한 작품이다.

 

백남준의 방은 유년 시절, 지역성, 아시아 문화의 전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탐구하고자 별도로 편성된 복합공간이다. 방 안에는 그와 관련된 독특한 오브제들로 채워져있다.

 

뉴욕 소호의 백남준 작업실

백남준의 책상은 백남준이 태내기 자서전과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의 회고록 일부를 미디어 극장처럼 연출한 설치물이다. 종이로 된 공책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라디오와 TV, 프로젝터가 작동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영상을 감상한다~
왠지 그랬을 거 같다는...

1984년 어느 여름날, 김포공항에 백남준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군사 독재의 무거운 속에 88서울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해외여행 자유화의 흥분이 뒤섞여 있는 서울에 그는 불현듯이 등장했다. 언론은 이름도 생소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세계적인 전위예술가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괴상한 차림새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거지로 백남준은 연일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다섯 살 때부터 유학 가던 1950년까지 13년을 산던 곳이야. 조선의 마지막 외무대신이 살았다는 우리 집은 대문이 어찌나 큰지 '큰 대문 집'으로 불렀지. 3천 평도 넘는 거대한 한옥이었는데, 마당이 넓고 뒤쪽에는 동산이 있어 아이들이 놀기가 아주 좋았어. 나는 고단샤노 에혼(그림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치원 친구 이경희가 놀러올 때면 방에 하나 가득 그 책들을 꺼내놓고 책만 보는 체하거나 책을 한 권씩 들고 뒷동산의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곤 했어. (행복이 가득한집 2016년 9월호, 백남준과 예술가 4인의 가상대화에서- 안녕히 오세요, 백남준에서)

 

백남준은 1950년 한국을 떠나 일본, 독인,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평소 그가 모았던 사슴뿔, 장난감, 구제 기계, 불상 등 많은 유품이 남겨졌다. 그것들은 백남준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소장품이 됐다.

그의 유품과 유사한 물건을 구제 시장에서 수집하고, 모친의 재봉틀과 고장난 TV 등 백남준의 생애에 주요한 기억 소품을 추가로 제작해 백남준의 아카이브를 찾아서를 구성했다. 장난감 로봇, TV 나비, 만화경, 렌즈 등이 있다. 

 

사슴뿔

디지털 액자는 백남준이 남긴 1998년의 드로잉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한 금강산 드로잉의 일부다. 

 

백남준의 방에서 바라본 버츄얼뮤지엄 공간
백남준카페

카페는 테라스까지 있는데 사람이 많아서 피아노 테이블만 담았다. 피아노는 어린 시절 백남준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준 악기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멋진 곡조를 연주하다가도 피아노를 밀쳐 넘어뜨리거나 망치로 때리고 그 속에 이물질을 채워 넣거나 개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파괴를 서슴지 않는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피아노 테이블은 2016년 그의 탄생일을 기념해 피아노를 부수는 축하 퍼포먼스를 했고, 그때 부서진 잔해를 재생한 작품이다.

 

백남준이라는 인물은 익숙하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많이 모른다. 백남준기념관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찾아 두루두루 다녀야겠다. 왜냐하면, 그를 기억하고 싶으니깐.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세계를 떠도는 삶을 살았던 예술가, 1984년에 불현듯 돌아왔지만 2006년 다시 우리 곁을 떠난 예술가, 그는 백남준이다.

2021.03.30 - 넥스트 아트 필립 콜버트전 | 복잡한데 어렵지 않아 (in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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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아트 필립 콜버트전 | 복잡한데 어렵지 않아 (in 세종문화회관) 마음의 양식을 위해서는 문화생활을 종종 해줘야 한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팝아트하면 앤디 워홀 그리고 필립 콜버트다.

onion02.tistory.com

 백남준의 작품 걸리버와 Video Chandelier No.5.를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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