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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공원 & 강감찬생가터

낙성대를 이름과 위치(서울대 인근)로 인해 대학으로 오해한 적이 있다? 없다? 솔직히 있다. 낙성대역 다음으로 서울대 입구역이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낙성대(落星垈)는 대학이 아니라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이다. 고려의 무신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공원

낙성대는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다. 생가 터는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여기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는 곳이다. 조선를 대표하는 장군이 이순신이라면, 고려는 강감찬 장군이지 않을까 싶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강감찬은 태어나는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알에서 태어난 사람은 신라를 세운 왕이 됐고,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사람은 귀주대첩의 영웅이 됐다.

 

카페도 있다네~
광장에 있는 강감찬장군 동상

갑옷에 투구를 눌러 쓰고 말에 올라 타 있는 모습이다. 왼손으로는 말을 다루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어 흡사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장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산장군 동상과 달리 매우 역동적이다.

 

광장을 나와 사당(안국사)으로 갑니다~
홍살문
외삼문(안국문)
고려 강감찬장군 사적비

낙성대 삼층석탑은 명장 인현공 강감찬(948~1031)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 터에 세워졌던 것으로, 1974년 장군을 위한 사당(안국사)을 짓고 주변을 정비하면서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 화감암으로 만든 삼층석탑의 앞면에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한 탑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내삼문
안국사(사당)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기붕 건물이다.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영정
여름인 듯, 아닌 듯, 가을같은 하늘
내삼문을 지나 외삼문을 향해 걷는 중~

외삼문 왼편에는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별로 태어나 나라를 귀한 영웅으로 살고 다시 하늘의 별로 돌아간 강감찬을 만나다"라고 전시관 팜플렛에 나와있다. 입장료는 없으며, 1월 1일, 설날과 추석 당일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전통놀이 체험마당
제기, 팽이, 딱지 그리고 투호던지기
강감찬 향나무 이야기는 생가 터에서 자세히~

강감찬의 5대조 강여청은 신라에서 금주로 이주했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신라에서 이주했다고 하지만 진골의 김씨나 박씨 또는 6두품의 성씨가 아니어서 이주 당시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지만, 정착한 후 호족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강감찬의 부친 강궁진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고려 장군복 체험

김식이 그린 귀주대첩 기록화. 오른편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추격하고, 낙마한 거란군을 창으로 찔러 무찌르는 모습을 통해서 고려군의 용맹성을 보여주고 있다.

거란군에 의애 서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현종에게 항복하기를 건의했다. 하지만 오직 강감찬만이 반대를 했고, 현종은 강감찬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로 남하를 결정하게 된다. 거란의 2차 침입 후 고려는 친조를 거부하고, 이는 거란의 3차 침입에 구실이 된다. 강감찬을 신뢰했던 현종처럼 선조도 이순신을 믿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거다.  

 

1018년 거란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단행한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대항했다.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명을 선발해 흥화진 인근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소가죽과 밧줄을 엮어 막아둔 채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한다.

거란은 연이은 패배로 회군을 결정하고 귀주에 이르자, 강감찬은 동쪽 들판에서 맞아 싸웠다.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휘몰아쳐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이 기세를 몰아 맹렬하게 공격하자 거란군이 크게 패하기 시작했고 도망가는 거란군을 뒤쫓아 거의 몰살시켰다. 

 

강감찬 한시. 외로운 학은 위나라 초헌에 태우는 총애를 받고, 한쌍의 원앙은 모론에 들었네. 가을바람에 무한한 한은, 한 잔 술 함께할 수 없어서라오.

 

고려사절요. 1452년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시대 편년체 역사서로, 강감찬이 거란의 2차 3차 침입에서 쌓은 업적과 강감찬의 탄생설화 등의 내용이 있다.

 

귀주대첩 후 개선하는 강감찬을 왕이 친히 마중나간 내용을 담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에는 강감찬의 비범함을 시로 표현했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의 가문과 업적, 탄생설화와 거란을 물리친 일화 등이 담겨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거란군의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획득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가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나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을 전례가 없없다고."라고 나와있다. 

강감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선하는데 현종이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가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고 위로했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은 그동안 요구해왔던 고려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게 됐다.

 

트릭아트 포토존

강감찬은 탄생설화 외에도 여러 설화가 있는데, 그중 지혜로운 꼬마원님 설화다. 강감찬이 13~15살의 어린 나이에 원님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강감찬은 아전들에게 뜰에 세워 둔 1년 된 수숫대를 꺾어 와서 소매 속에 집어넣어 보라고 했다. 수숫대가 소매에 들어가지 못하자 강감찬을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14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남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수없이 헤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는 설화도 있다.

 

낙성대공원에서 강감찬 생가 터는 약 800m 떨어져 있다. 관악구 낙성대동 218-14번지는 강감찬이 태어난 집터이다. 낙성대는 떨어질낙, 별성, 집터대로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에 강감찬의 탄생설화가 실려있다. 그가 태어난 날 밤, 마침 그 고을에 송나라 사신이 들어왔다가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그 집으로 보내어 가보니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낙성대 유허비
강감찬 나무로 불리는 향나무

낙성대 생가 터에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있었다. 높이 17m, 둘레 4.2m의 나무로 서울에서 제일 큰 나무 중 하나였다. 1968년 서울 특별시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고사되어 지정보호수에서 해제됐다. 이후 고사된 향나무는 생가터 소유자가 변동되면서 잘려진 후 분실됐다. 2014년 수소문 끝에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란 나무의 밑동 중 하나를 찾아 전시관에 전시, 현재 생가터에 있는 나무는 1996년 수령 150년 된 나무를 구입해 대체했다.

 

어릴 때 만화 위인전으로 처음 만났고, 학교 다닐때 역사 교과서에 꼭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굳이 찾아가야 하나 망설였는데, 괜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그때는 무조건 외워야만 했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역사 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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