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광화문광장은 국가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이 되어 온 역사적인 공간이다. 600여 년 전 한양이 조성된 이래 핵심 관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온 육조거리 그리고 그 곳을 오고 간 관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광화문 600년 세가지 이야기 중 첫번째는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다.
작년에는 사전예약에 상설전시는 관람을 할 수 없고 기획전시만 가능했다. 지금은 상설전시에 기획전시까지 다 가능한데 조건이 있다. 12월 13일부터 방역패스가 의무적용된다. 접종완료자와 PCR 음성확인서 소지자(발급일로부터 48시간 유효)만 입장이 가능하단다. '부스터샷까지 맞았으니 나는야 프리패스~'
서울역사박물관이 처음은 아닌데, 신기하게도 상설전시는 아직 관람 전이다. 서울의 역사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데 굳이 전시까지 봐야 하나? 요런 맘이 있어서다. 그러다보니 기획전시 위주로 관람을 한다. 한양의 상장대로 육조거리는 광화문광장에 관심이 많은 1인에게 맞춤형 전시다.
입구에 들어오면 현 광화문광장, 구 육조거리를 볼 수 있는 사진(정확한 명칭 모름)이 있다. 움직임에 따라 현재에서 과거로, 육조거리에서 광화문광장으로 시간이동을 한다.
광화문 앞 육조 관청이 좌우로 늘어서 있던 가로를 육조거리라고 부르는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같은 사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명칭이다. 원래 명칭은 광화문 앞길, 육조대로, 육조가였다.
육조거리는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를 말한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법궁인 경복궁을 건설하면서부터 그 앞의 육조거리는 국가의 권위를 상징했다. 육조거리는 의정부를 비롯한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자리했다. 한양 최대의 관청가로 관원들의 출퇴근길이자 업무 공간이며, 왕의 행차와 사신을 위한 행사 등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백성을 위한 신문고가 설치되고 격쟁과 상언이 이루어지는 등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1405년(태종 5년)의 관제 개혁 때 육조 관청들은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되었고, 소속 관청이 설치되면서 관장 업무가 확대되었다. 태종 재위 당시 육조의 서열은 이-병-호-형-예-공의 순이었으나, 세종때 이-호-예-병-형-공의 순으로 정리되었다. 동쪽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 서쪽에는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공역의 부담때문에 경복궁은 중건되지 못하고, 왕의 거처는 창덕궁과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된 비변사와 경복궁 안에 설치 되었던 여려 관청들도 왕이 머무는 궁궐로 옮겨갔다.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은 행정실무 관청으로 왕과의 거리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경복궁은 비어 있었음에도 육조거리의 관청들은 그대로 위치를 지켰다.
비변사는 중종 5년 삼포왜란때 변방의 경비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 이후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기구로 성장한다.
초헌은 종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이 타던 가마다. 긴 끌채 아래 외바퀴가 달여 있으며, 보통 6~9명이 어깨에 메고 이동했다. 초헌을 타는 관원의 집은 솟을대문을 만들고 문턱을 없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남여는 정3품 이상의 고위 관원이 타던 가마다. 끌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고 발디딤판과 함께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다. 타고 내리기 쉬워 비와 눈이 올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사용했다.
평교자는 종1품 이상과 기로소의 당상관이 타던 가마다. 앞뒤로 모두 네 명이 어깨에 메고 이동했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가마도 달라진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의정부는 관원을 통솔하고 정사를 총괄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관청으로, 그 위상에 맞추어 육조거리의 동쪽 첫번째 자리에 있다. 의정부 중심건물인 정본당은 삼정승의 집무공간이고, 협선당은 종1품인 찬성과 정2품인 참찬의 집무 공간으로 사용됐다. 석획당은 종2품 또는 최소 정3품 당상관 이상의 집무공간이다.
의정부의 재상은 많은 관직을 겸직했다. 의정부 성립 초기 정2품 이상의 관원들은 판이, 호, 예, 병, 형, 공조사 등을 수시로 겸임하면서 인사, 군사 분야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이러한 겸직제도는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계승되었다.
이조는 문관의 선발, 공훈에 따른 작위 부여, 관원들의 근무성적 평가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육조 중 수석 관청이어서 천관이라고도 불렀으며 동전, 선부 등의 별칭이 있었다.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은 육조의 속사에서 실무를 담당했는데, 정랑과 좌랑은 인사행정을 담당해 전랑이라고 불렀다. 전랑은 관원을 추천하고 선발하는 막중한 권한을 가진 직책이다.
호조는 호구, 공납과 부세, 조세 등 재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지관, 지부, 창부, 탁지 등의 별칭이 있다. 종6품의 산학교수 이하 관원들은 회계전문가를 교육하고 육성하는 산학에 소속되었는데, 산학교수는 훈도와 별제를 거친 자 중에서 천거를 받아 임명했다.
예조는 예의와 음악, 연회와 제사, 외교, 교육, 과거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남궁, 춘관, 의조 등의 별칭이 있다. 예조의 업무는 매우 많고 다양했기 때문에 육조의 그 어떤 관청보다도 속아문이 많았다. 평상시에는 속사에 편제된 정랑, 좌랑이 중심이 되어 업무를 수행하다가 돌발상황이나 중대 사항이 생길 시 판서와 참판, 참의가 속사를 지휘했다.
병조는 무관의 인사행정, 왕의 행차에 관련된 의장 및 교통행정, 군역 징발 및 병무행정 등의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하관, 서전, 군부, 기성 등의 별칭이 있다. 병조는 육조의 다른 관청과 다르게 참지 1명과 정랑 및 좌랑이 1명씩 더 있었는데, 이것은 궁궐 안에도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내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조는 법률, 상언, 범죄 심리, 소송 및 노비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추관, 추조, 법조, 형관 등의 별칭이 있다. 사법에 관여하는 의금부, 한성부와 함께 삼법사로 불렸고, 관리의 잘못을 논하고 풍속을 규찰하는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성이라 불렸다. 종6품의 율학교수 이하 관원들은 법률전문가를 교육하고 육성하는 율학청에 소속됐다.
공조는 국가의 토목공사, 산과 하천관리, 소택관리, 공예품과 도량형 제작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동관, 수부, 예작 등의 별칭이 있다. 종8품 공조는 각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에게 준 잡직이며, 지장, 옥장, 은장, 궁인, 시인, 주장, 석장, 목장, 야장 등의 장인들을 전문기술에 따라 해당 관청에 배정했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종2품 관청으로,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을 관장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상대, 오대, 백부 등이 있다. 사헌부의 관원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탄핵검찰권과 일반 범죄에 대한 검찰권, 인사와 법률 개편에 대한 동의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서경권 등을 가졌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정2품 이상, 나이 70세 이상의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정이다. 기로소는 봄, 가을 두차례 기로연을 열고 명부를 관리하는 일 외에는 직무가 없었다. 영조 41년 기로소가 독립 관청의 위상을 갖게 되면서 영수각을 지키는 수직관 2명을 두었다.
관원의 정기휴일은 일 년에 대략 90일이었다. 매월 1일, 8일, 15일, 23일과 24절기를 더한 72일이 기본 휴일이었고, 명절 휴가(설날 7일, 대보름, 단오, 연등회 각 3일 그리고 추석 1일)가 있었다. 관원은 매월 정해진 날짜에 녹표를 가지고 광흥창으로 가서 녹봉을 받았다. 이조와 병조에서 녹과에 따라 녹패를 발급하면 호조는 녹패에 따라 인수증인 녹표를 발급해줬다.
영조는 재위기간 대부분 금주령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음주는 기호가 아닌 범죄였으며, 상당 기간동안 술의 양조와 매매가 금지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동서로 시전행랑들이 들어서 있는 운종가와 인접했던 육조거리의 배후지역은 술집이 즐비한 유흥가였다.
영조와 달리 정조는 술이 법으로 통제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규제를 철폐했다. 관원들은 대개 6시를 전후해 관청을 나섰는데, 업무의 연장선이나 일과 후의 해방감으로 동료 관원들과 함께 술집을 찾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왕조 500년간 국가권력을 상징했던 육조거리는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식민통치를 위한 광화문통으로 바뀌는 질곡의 역사를 겪었다. 광복이후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광화문통에서 세종로로 개명을 했다. 국가의 상징거리였던 육조거리(세종로)는 2002년 월드컵과 촛불을 지나면서 시민의 광장으로 거듭났다.
2022년 4월 광화문 광장은 재개장을 앞두고 있다. 육조거리를 얼마나 재현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다. 첫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 두번째 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고궁연화 경복궁 발굴 복원 30주년 기념 특별전이 이어집니다.
2021.06.03 - 고고학자가 된 듯 광화문광장 발굴문화재 탐험
2022.01.13 - 광화문 600년 세가지 이야기 "고궁연화" 국립고궁박물관
2022.01.18 - 광화문 600년 세가지 이야기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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