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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하면 스릴러다. 그의 대표작 중 대부분이 스릴러 소설이지만, 은근 따뜻하고 동화같은 소설도 많다. 감성 복수극 유성의 인연에 이어 편지라는 매개체로 독특한 시간여행을 보여준 나미야의 잡화점은 강렬함보다는 부드러움을, 긴장감보다는 힐링을 준다. 작년부터 엄청나고 묵직한 대하소설만 읽다가, 모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 없을까 밀리의 서재를 뒤지다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시선을 멈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 소설이고, 나미야의 잡화점처럼 따뜻한 감동소설일 거 같아서다.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앗다. 거센 파도가 아니라 잔잔한 파도가 천천히 왔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긴장감은 단 1도 없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커다란 비밀이 하나 있지만, 굳이 미리 찾아 내거나 복선의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읽다보며 자연히 알게 된다. 

 

녹나무(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출처) / 이웃집 토토로

녹나무란 실존하는 나무가 맞나 했다. 나무 안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밀초를 켜고 기념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녹나무는 진짜 있는 나무다. 우선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소원을 비는 큰 나무로 나오고, 토토로가 선물해준 씨앗에서 밤새 쑥쑥 자라는 장면 속 나무가 녹나무다. 녹나무는 성장이 빠르고 거목으로 자란다고 한다. 소설 속 커다란 구멍도 존재할 수 있을 듯 싶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녹나무 자생지가 있다고 하던데, 제주 여행때 꼭 가봐야겠다.

 

주인공은 녹나무 파수꾼 견습생 나오이 레이토와 녹나무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야나기사와 치우네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둘은 만나게 되고, 치우네는 레이토에게 녹나무 파수꾼을 맡긴다. 견습생 신분으로 녹나무를 관리하지만, 그저 관리인일뿐 녹나무에 관한 비밀은 일절 모른다. 기념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과 동네 어르신은 그 비밀을 아는 거 같은데, 치우네의 부탁으로 인해 레이토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수꾼은 남이 아니라 스스로 비밀을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믐날과 보름날 밤이 기념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입니다. 다들 그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 날짜를 중심으로 예약을 하시는 것이지요."

"적합하디니, 그건 무슨 얘기죠?"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기념의 효혐이 있다는 뜻입니다."

"효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치후네는 한 호흡을 멈췄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본문중에서)

 

래이토처럼 그 비밀이 무지 궁금했지만, 스릴러나 미스터리 소설처럼 막 찾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흐름상 녹나무의 비밀을 알려주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선 아빠의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 레이토와 의기투합하는 유미와 기념을 하러 오는고객 중 기념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소키가 등장한다.

 

유미는 아빠의 불륜현장을 잡기위해 미행을 하다가, 녹나무가 있는 월향신사까지 오게 된다. 여기서 레이토를 만나, 그녀는 아빠의 불륜 증거를, 그는 유미를 통해 녹나무의 비밀을 깨내려고 한다. 그리고 소키는 레이토에게 가르침을 받는 인물이다. 즉, 유미로 부터 알게 된 기념의 진정한 의미를 파수꾼으로서 소키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치우네는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알게 돼라고 했지만, 저절로라기 보다는 유미 아빠를 통해 알게 된다. 그가 주저리 주저리 다 말해주기 때문이다. 몇가지 힌트 정도는 스스로 알아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힌트는 유미 아빠가 다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가 끝내 풀지 못한 비밀을 유미와 레이토가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녹나무의 비밀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밀의 열쇠를 푸는 순간, 감동의 파도가 함께 밀려온다. 기념, 염원, 수념... 이 차이는 책을 읽으면 바로 알게 된다. 유언은 글로 남기지만, 진짜 남기고 싶은 건 글이 아니라 마음일 것이다. 벅찬 감동은 아니지만, 잔잔한 따스함이 느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중 가장 맘 편히 본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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