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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전자북

지난해 8월 아리랑을 시작으로 태백산맥 그리고 한강까지 2개월, 4개월, 40일 만에 다 읽었다. 총 32권을 읽는데, 반년이 걸린 셈이다. 완주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지난주 한강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스스로에게 칭찬을 했다. 그런데 6개월조차 힘들다고 했는데,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마흔에 시작해 아리랑을 거쳐 한강을 쓰고 나니 예순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현대사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걸린 시간, 20년 존경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너무 늦게 읽었고, 고작 한번 완독했다는 게 너무 부끄럽다. 

 

을사보호조약 체결부터 해방기까지 수난의 역사를 다룬 아리랑,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기까지 분단의 역사를 다룬 태백산맥, 그리고 한강은 1959년부터 1989년까지 분단 이후부터 30년을 다뤘다. 4.19, 5.16, 유신,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에, 연좌제, 서독 광부 간호사 파견, 전태일 열사, 와우아파트 붕괴, 사법파동, 광주대단지 사건, 월남전 파병, 기생관광, 새마을운동, 사우디아라비아 중동 건설 현장 등 30년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추 1,200여 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리 한 장면만 스치고 지나가는 단역이라 해도 그 이름이 전 작품 그 누구와 같아서는 안된다."(한강을 마치며 중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한강에서 유일민과 유일표 형제는 꼭 기억해야 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연좌제의 피해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1980년 연좌제 폐지까지 형제의 삶은 실패와 좌절 뿐이었다. 

 

서울사는 서울 촌놈인 겨야. 곧 알게 되겠지만, 사실 이 성북동 골짜기마다 시골서 몰려온 사람들로 만원사례지. 신설동 산동네가 그런 것처럼. 그런데 사람들은 날마다 서울역에서 내리지. 어디다 움막이라도 쳐야겠지. 그러다 보니까 여기보다 더 변두리인 미아리나 종암동, 청량리 같은데로 밀려가는 수밖에. 나라나 서울시에서 속수무책임재로 무허가 판자촌이 생겨나고 있는 판이지.

내리막길이 끝나면서 소문난 부자동네 혜화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사이에 두고 혜화동과 성북동의 차이는 너무나 현격했다. 지주의 기와집과 소작인의 초가집 차이였고, 비단옷 입은 여자와 무명옷 입은 여자의 차이였다. 그들은 큰 길을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이라지만 한옥들의 으리으리함과 우람함에 걸맞도록 폭 넓은데가 포장까지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본문중에서)

 

현대사를 다룬 소설인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자꾸만 현실과 오버랩이 됐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데, 그때나 지금이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역사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가 왔건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역사에 짜증이 난다. 방역 선진국 대한민국이듯, 지긋지긋한 반복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선두가 저지선에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앞줄에 서 있던 소방차들이 일제히 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건 뜻밖에도 붉은 물이었다. 느닷없이 터진 물.대.포.의 위력에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뒤로 밀리고 있는 데모대의 선두는 온통 붉은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중간생략) 마산 데모 진압에 사용했던 방법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었고, 옷에 붉은 물이 든 사람들을 검거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행위였다. 일제 경찰은 조선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며 형사나 끄나풀들을 시위대 속에 침투시켜 파란 잉크나 빨간 잉크를 등 뒤에 몰래 뿌리게 해서 시위자들을 검거했다. 그 수법을 한국 경찰은 고스란히 이어 받은 거였다.(본문중에서) 

물대포가 4.19 혁명에 사용됐다니, 대단하고 끔찍하다.

 

10분이 채 못 되어 신문사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기 시작했다. 인쇄잉크며 기름같은 인화성 물질에다가 종이까지 많은 불길이 빠르게 번진 것이었다. 오후 3시의 태양 아애 서울신문사는 걷잘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여 외롭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본문중에서)

그로부터 20년 후, 광주 MBC 방송국은 불길에 휩싸여 불타올랐다. 아쉽다. 촛불을 들었을때...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5.16때 봤지? 총칼의 위협 앞에서 모든 신문들이 여기저기 먹통으로 찍혀나가는 거. 신문이라고 현실 앞에서 제왕의 자유를 멋대로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저 최대한의 목탁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본문중에서)

5.16에 이어 언론통폐합까지 그저 겁에 질렸던 언론사들이 이제는 살맛난다고 펜대를 엉망으로 굴리고 있다. 겁이 사라지니, 사주의 이익을 위해 춤추는 기레기들이다.

 

판사가 제주도로 출장을 갔는데, 그는 왕복 항공권과 숙식비를 제공받았을 뿐만 아니라 향응에다 몇만원의 돈까지 받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은, 그건 으레 있는 관행일 뿐인데 그렇게 문제삼는 것은 사법권 독립 침해라고 집단 사표를 내며 맞서고 나섰다.(본문중에서)

1차 사법파동이다. 관행, 관행, 관행...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다른 신문들은 다 협조가 잘 됐는데, 사장님 신문이 잘 돌지를 않습니다. 편집국장이 좀 고지식한 모양인데 사장님께서 좀...... 예. 예. 영웅호걸도 말에서 떨어질 때가 있어야 재미 있지요. 하하하하...... 그리 이해해 주셔서 백골난망입니다. 이 은혜는 광고국을 통해서 작년의 배로 갚겠습니다." 장주호 사장은 쯧쯧쯧 혀를 차며 송수화기를 던지듯 해버렸다. 재벌은 거대한 산이다. 아니 산맥이다. 돈으로 덮이지 않을 사회악은 없고, 그들은 무기로 완정무장되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잉태해 낸 공룡이고 악마들이다. (본문중에서)

여배우와의 스캔들 기사를 막는데는 돈이 최고. 그저 광고비를 더 준다고 하면 무사통과다. 이때에 문자가 가능했다면, 굽신굽신... 안봐도 비디오다.

 

"그 일이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자들의 거처를 신속하게 알아내는 거요. 기자로서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말이오." 민(중정요원)이 담배연기를 씹듯이 말했다. "거 있잖아. 비밀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시도하란 말이지. 기자한테는 취재원 보호라는게 있으니까 그걸 내세워 절대비밀을 보장하겠다고 안심시키면서 말야." 김(중정요원)이 말을 거들었다. "그렇소. 그 방법을 쓰면 우리 일을 돕는 효과가 클 거요." 민이 종이 한 장을 이경열(신문사기자) 앞으로 밀어놓았다. 대여섯명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쓸적 보고 이경열은 커피잔을 들었다.(본문중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때는 중정이고 지금은 검찰이니 역사의 반복은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 

 

태백산맥보다는 아리랑을, 아리랑보다는 한강을 읽는데 더 수월했다. 하지만 울화는 한강이 가장 심했다.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그때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은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 한강에 이어 천년의 질문으로 바로 넘어가야 하는데, 밀리의 서재에 전자북이 없다. 요청을 하긴 했는데, 전자북은 아직인가 보다. 그래서 살짝 방향을 틀어, 김충식 작가의 남산의 부장들을 읽고 있다. 한국의 CIA 중정, 그곳이 궁금하다. 읽다보면 홧병이 날 거 같지만, 반복된 역사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읽어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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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아리랑 |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다

12권을 다 읽기까지 두어달 걸렸다. 무섭게 더웠던 8월의 어느날, 일제강점기를 두고 얼토당토않는 말들이 가방끈이 겁나 긴 자들을 통해 쏟아졌다. '왜 저럴까?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진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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