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은 지났지만, 시리즈는 계속 되야 하기에 또 떠났다. 이번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서울에 애국선열을 기리는 기념관이 이렇게 많았는지 솔직히 몰랐다. 하긴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으니, 더 할 말은 없지만... 역시나 처음 알게 된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양재 시민의 숲에 있다. 그런데 이 곳, 엄창나게 자주 갔던 곳이다. 그런데 전혀 몰랐다. '너 이러고 애국심을 논할 처지가 되냐'고 자책하면서 서둘러 발길을 향했다.
2호선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고 2정거장만 가면 양재시민의 숲역이 나온다. 여기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출구에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이라고 나오니,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신분당선이 9호선처럼 민영화철도라 그런지, 추가 요금(1,100원)이 나왔다. 여기서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집에서 기념관까지 오는 간선버스가 있었다.
대중교통편을 잘 보고 와야 하는데, 급히 출발하는 바람에 요런 실수를... 신상(?) 지하철답게 신분당선은 깨끗하고 좌석도 여유롭고 편하게 오긴 했지만, 추가요금은 살짝쿵 아깝다.
길 건너 보이는 저 건물, 혹시했는데 맞다. 저기가 바로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이다. 오늘따라 하늘은 왜이리도 맑은지, 시리도록 푸른 하늘 덕에 내 눈은 벌써부터 시려온다.
길을 건너면 바로...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나온다.
매주 월요일, 설 및 추석 연휴는 휴관이라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매헌 윤봉길의사 흉상이 바로 보였다. 윤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광현당에서 파평윤씨 윤황 공과 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이고 아호는 매헌이요, 봉길은 별명이라고 한다.
윤봉길의사하면 도시락폭탄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요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우선 윤의사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각곡독서회, 수암체육회, 축산장려회, 효실천위친계, 월진회 등을 조직해 농촌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흉상 옆으로 농촌부흥운동을 했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윤의사는 20세때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부흥원을 건립하여 야학, 강연회, 학예회, 체육대회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나라 살리기 운동에 앞장선 농민 운동가요, 문필가이면서도 행동하는 사상가, 실천하는 선구자였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1926년 10월 어느날, 윤봉길의사는 서당 오치서숙에서 글을 읽다 잠시 덕숭산 쪽으로 산책을 하던 중 한 청년과 마주쳤다. 그 청년은 가슴에 공동묘지에서 뽑은 나무 묘표를 한 아름 안고 있었고, 글을 읽을 줄 아시냐며 묘표를 윤봉길의사 앞에 놓았다. 윤의사는 묘표를 뒤적이다 마침 청년의 선친 이름을 찾아냈다.
그러나 청년이 묘표를 뽑은 자리를 표시하지 않아서 비록 선친의 팻말은 찾았으나 결국 선친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묘소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윤봉길의사는 '한 사람의 무지는 무덤을 잃게 하지만, 민족의 무지는 나라를 잃게 했구나'하며, 무지가 일제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문맹퇴치운동과 농민운동에 전념하기로 다짐하였다.
맞은편은 그날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 안중근의사 기념관처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도 전시실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가 없다. 밖의 모습은 담을 수 있는데, 동상만 있던 다른 기념관과 달리 흉상과 동상 그리고 그림 등이 있어, 아직 전시실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분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림만으로는 다 알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전시실로 들어가야겠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많이 알고 있던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침략 수뇌들을 정의의 폭탄 한방으로 통쾌하게 응장했던 그날의 모습이 그림과 동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23세때인 1930년 3월 농촌부흥 운동의 한계를 느낀 윤의사는 독립운동에 몸은 바쳐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고향산천, 부모형제, 처자식까지도 뒤로 한채 압록강을 건너 이역만리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망명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1932년 그날이 왔다.
본격적으로 매헌 윤봉길의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서 가슴에 담고 나왔다.(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전시된 유물과 서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탄생부터 농촌부흥운동 그리고 그날까지 모든 것들을 시대별로 하나하나씩 다 볼 수 있다.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윤의사는 일본군에 잡혔고, 1932년 12월 19일 사형집행으로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이 사형집행의 모습을 일본군은 사진으로 남겼다. 사형 전과 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제어기능을 상실한 눈에서는 또...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한 그분의 마지막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겨야 했는지, 진짜 이 세상 모든 욕을 다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심한 만행을 저질렀다. 사형집행 후 윤봉길의사의 묘를 평묘로 해서 일본 가나자와시 순국지 인근 쓰레기 하치장 옆 통로에 묻었다. 광복 후인 1946년에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기까지 14년동안 죽어서도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이런 진짜 쳐죽일...
윤봉길의사는 본인의 새 시계를 김구 선생에게 드리면서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바로 그 시계다.
전시실은 1층으로 되어 있고, 전시실 맞은편에는 생애도 전시실로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고, 효창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 묘소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특히, 의거 전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니이다"라는 선서문도 함께 볼 수 있다.
윤의사는 홍구공원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도시락과 물병형 폭탄이었다고 한다. 성공적인 의거를 위해 10여차례나 실험을 강행했다고 한다. 도시락과 물병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청년 제군에게 쓴 윤봉길의사의 한시가 있다.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외걸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 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曙色)은 점점 밝아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녀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2층은 윤봉길 새책도서관이 있다. 지역주민이라면 애용할텐데, 아니므로 슬쩍 보고 내려왔다.
도서관 옆에 있던 매헌 윤봉길의사의 초상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는
① 침체되어 꺼져가던 대한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 의거 후 23년이 지나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었다.
② 국권을 침탈한 일제의 만행과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조직적이고 맹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횃불이 되었다.
③ 만보산사건으로 극도로 악화되었던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중국이 우리 민족을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함께 싸우는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었고,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④ 한편 기세등등하던 일제는 전의가 상실되어 침략전쟁을 중단하고 화해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동양평화가 앞당겨지게 됐다.
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면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여 상해 임시정부가 부활하게 되었고, 광복군과 의용군 활동도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는 후일 대한민국의 독립과 정부수립, 국군의 건군 등에 초석이 되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쾌거로 평가된다. (출처 - 매현 윤봉길의사 기념관)
기념관 한쪽에는 선서문쓰기 체험 코너가 있다.
종이인형도 만들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하지는 않고 그저 바라만 봤다.
기념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매헌 윤봉길의사 숭모비와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매헌 윤봉길의사 숭모비로 상해 의거 61주년인 1993년 4월 29일에 세워졌다고 한다.
매헌 윤봉길의사 동상. 불끈 쥔 왼손이 인상적이다.
안중근의사도 윤봉길의사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거 같다. 의거 후 당당한 그들의 모습에서 뜨거운 애국심이 느껴졌다. "일본에는 사형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미소를 지은 안중근의사처럼 윤봉길의사도 그러했겠지. 잊지 않고 당신들의 은혜를 길이길이 우러러 보겠습니다. 정말 고맙고 고맙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봉창의사,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 그리고 곧 만나게 될 도산 안창호선생까지 모두다 독립된 대한민국을 못보고 돌아가셨다. 햇살 좋은 파란 하늘이 오늘따라 너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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