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정부 대통령은 김구선생, 부통령은 이시영선생, 외교부장관은 안창호선생, 국방부장관은 안중근의사, 교육부장관은 윤봉길의사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최강 드림팀이었겠지. 하지만 역사는 만약이 없는 법. 그저 혼자만의 꿈으로 끝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꿈이 진짜 현실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많이 달라져있을까?
광화문 또는 종로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면 항상 듣게 되는 말, "이번 정류소는 강북삼성병원 · 경교장입니다." 병원에 가려져 있어 경교장은 버스 안에서는 볼 수 없었다. 매번 목적지가 다르기에 스쳐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당당히 경교장만을 바라보고 강남(도산공원)에서 점프했다. 백범 김구선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곳,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가장 안타깝고 슬픈 곳, 경교장(京橋莊)이다.
강북삼성병원에 경교장이 있다. 예전에 병원 건물로 사용했다고 하더니, 정말 병원 부속 건물이라고 해도 믿을거 같다. 지금은 복원이 되었으니 망정이지, 예전에는 여기가 경교장인 줄 모르고 그냥 막 사용했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렸을때 도심의 큰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다. 혹시 거기가 여기는 아니겠지. 그때 도와주셨던 분이 무교동에 살고 계셨는데, 혹시 혹시... 그럼 나도 여기가 경교장인지 모르고 이용했던 사람이었구나.
『경교장(京橋莊)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평동)에 위치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일본식 주택이다. 일제 강점기의 금광업자 최창학의 별장이자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김구의 사저이자 공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 한국독립당의 당 본부였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주중화민국대사관으로 활용되었다. 별칭은 죽첨장(竹添莊), 죽첨정(竹添町)이다.』(출처 - 위키백과)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이 휴관이며, 화~일요일까지 9시 ~18시까지 운영한단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문의는 02)735-2038. 전시실 내부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플래시만 안하면 된다.
입구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또 문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다.
백범 김구선생에게 경교장을 제공한 최창학은 조선인 최대의 광업자이며 천만장자라고 한다. 그런데 최창학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신발을 갈아 신고, 팜플렛과 함께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관처럼 경교장에도 스탬프가 있다. 기념이기에 꾸욱~ 내가 찍고, 촬영하고 가방에 넣었다.
1층의 모습이다. 경교장 모형이 있고, 오리엔테이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저 의자에 경교장에 대해 설명해주는 해설사분이 앉아 계신다. 그분에게 부탁해 경교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봐도 좋지만, 혼자 왔기에 혼자 구경하기로 했다. 백범 김구선생에 대해서는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어느정도 학습을 했기에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파노라마 기능은 있어도 못 쓰는 1인이구나. 지금 보이는 곳이 1층 정중앙이며, 오른쪽으로는 귀빈식당과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및 지하 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왼쪽으로는 응접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또 있다.
지하 1층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지하 1층은 경교장의 역사(제 1전시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제 2전시실),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제 3전시실)로 되어 있다.
제 1전시실에서 만난, 경교장 복원 모형.
지하 1층의 모습.
1층의 모습.
그리고 2층의 모습이다.
『1949년 김구가 경교장에서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경교장은 병원으로 내·외부가 개조되어 원형이 변형되었다. 1960년대부터 경교장 보존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재 지정이 검토되기 시작해 2001년 비로소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2010년 역사적인 경교장 복원이 시작되었다. 복원공사는 경교장 내 병원시설을 철거하고, 건축 당시의 설계도면과 임시 정부 거주 당시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내부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2011년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3년 3월 1일 개관하였다.』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면서 2013년에 개관이라니. 그나마 이렇게 원형으로 복원됐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여전히 병원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면, 내 까칠함은 최고치를 경신했을거 같다.
제 2전시실의 모습.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먼저 학습하고 왔지만, 배움의 끝은 없는 법. 또 다시 하나하나 살펴봤다.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으로부터 환국(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환국도 모두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졌다)하여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과 북이 하나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정부로 그 법통이 계승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헌법 전문을 통해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고, 구호(대한민국) · 연호(대한민국) · 국기(태극기) · 애국가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제 3전시실에서 만남 경교장에 돌아온 임정요인. 이름별로 터치하면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1945년 11월 조국에 돌아온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에서 남과 북의 역량을 단결하여 자주 통일의 구체안을 완성하기 위한 국무위원회를 지속하고,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최후의 노력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소위이며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날의 아픔. 김구선생의 혈의와 데드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보자마자 바로 묵념부터 했다. 너무나 원통하고, 슬픈 그날의 기록이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서거 후 40년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 활동에서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친일파와 반통일세력 그리고 당시 정권 수뇌부(이승만)에 의해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된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다시 1층으로 올라와서, 귀빈식당으로 들어갔다. 귀빈식당은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의 공식만찬이 개최되고,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했을때 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선전부 활동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만남 윤봉길의사 유골. 윤봉길의사 유해는 일본에서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선전부 활동공간은 임시정부의 홍보 및 언론관계를 담당하였던 선전부가 활동하던 곳이다.
1층 응접실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 등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중앙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던 중 만난, 건축당시 대리석 원형(흐린색)과 보원된 대리석(진한색)이다.
2층은 백범 김구선생 침실과 거실, 임시정부 요인숙소, 응접실 등으로 되어 있다. 김구선생의 집무실인데, 저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그래서 복도를 따라 걷다보면,
백범 김구선생 거실이자 집무실이 나온다. 여기는 평상시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집무실 옆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여기가 안두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라고 한다. 또 다시 묵념을 드렸다.
임시정부 요인 숙소로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수행원들이 환국하여 머문 곳이다.
2층 응접실(서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김구선생과 정당대표들과의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임시정부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벽난로.
오토마타 체험실로 임시정부 당시 비서 선우진의 방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개최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 회의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인형들이 살짝살짝 움직인다.
역사에는 IF는 없지만, 계속 머리 속에는 만약에 암살이 없었다면, 만약에, 만약에.... 자꾸만 실현불가능한 일들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터벅터벅 내려왔다.
3·1절 시리즈는 이렇게 끝났다. 번외편으로 탑골공원을 생각하고 있지만, 언제 갈지 모르겠다. 왜냐면 가장 어렵고 아팠던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아픔을 슬퍼하면서 고작 울기만 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지금 당장 이 나라를 위해 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했다. 더불어 몇 번의 금요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선생 말씀처럼 그런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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