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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사형집행일이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독립을 했다. 그러나 순국한지 105년이 지나고 해방이 된 지 6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에 있는 그의 묘소는 여전히 가묘(假墓)로 남아 있다. 유언대로 지켜드려야 마땅한 일인데, 그러하지 못해 너무나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소니 nex-3n으로 촬영)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남산에 있다. 가묘이지만, 묘소는 효창공원에 있다. 남산도서관을 지나면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기념관을 가기 전에 동상을 먼저 만나게 된다. 저 아이들은 안중근의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냥 위인으로 생각하겠지. 나 역시 그러했으니깐. 서울나들이라고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녔지만, 이번 삼일절 시리즈는 너무나 아프다. 나들이라는 말을 쓰기 조차 너무 죄송스럽다. 백범 김구 기념관효창공원 그리고 안중근의사 기념관까지 아픈 우리의 역사를 보면서 눈물만 났다. 매번 재미나고 즐거운 것만 찾아 떠나는 나들이도 좋지만, 우리의 아픈 역사도 알아야 하기에, 우리가 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멈추지 않았다.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 '너무 늦게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안중근의사 동상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기념관이 나온다. 그러나 기념관으로 가기 전에, 먼저 봐야할 것이 있다. 뒤를 돌아보면,

 

안중근의사가 남긴 말과 글이 돌에 새겨져 있는 곳이 나온다. 하나하나 다 살펴보면 좋을거 같다.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나하나 보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눈물만 그렇게 눈물만 났다.

 

어릴적 위인전으로 드라마로 영화로 만났던 그분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다. 벌써부터 울면 안되는데, 왜이리도 조절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노란 선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기념관 외벽에는 안중근의사의 말과 글 그리고 손도장을 볼 수 있다.

 

입구

백범 김구 기념관처럼 여기도 사진촬영을 하면 안된다. 나도 목에 카메라를 걸고 전시실을 다녔지만,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촬영을 그것도 아이와 함께 전시실 내에서 찍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제발 좀 안했으면 좋겠다.

 

전시실 로비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으로 작품명은 대한국인 안중근이다. 제작은 강익중 재미설치미술가이며 설치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 말씀 80자를 붓 대신 작가이 손으로 한자한자 그려 넣은 작품이다. 청색의 산은 한반도의 푸른 기상과 안중근의사의 평화정신을 상징하며, 단청색의 글자는 의사의 말씀이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지구촌의 기둥과 서까래가 되어 온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남기를 희망하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전시실은 총 3개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하1층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걸 보고 있는 곳이 지하 1층이므로 바로 전시실로 들어가면 된다. 나처럼 바보같이 직원에서 "지하1층으로 어떻게 가나요?"라고 물어보지 마세요.

 

안중근의사 기념관 팜플렛과 의사에 대한 일대기가 간략하게 나온 작은 책자는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안중근의사 동상. 여기까지는 촬영이 가능하다. 흰 한복을 입은 안중근의사, 사형집행일에 입은 옷으로 어머니가 보내줬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기에 너무 아프고 슬펐다.

 

동상 뒤로 보이는 태극기와 대한독립. 1909년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의 왼손 무명지(넷째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로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을 맺었다. 여기서도 가슴이 먹먹하고 아픈데 도저히 전시실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생기지 않아, 얼마동안 숨을 고르고 난 후에 전시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안중근의사의 손도장이 바로 보였다. 단지동맹 후 왼손 무명지 첫관절이 없는 바로 그 손도장이다.

 

(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

제1전시실은 참배홀과 안중근의사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가문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번호를 클릭하면 사진과 함께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구한말 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어지럽던 1879년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가문은 해주일대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일곱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고 했다고 한다. 

 

제 2전시실은 안중근의사의 본격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부친 안태훈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모든 가족과 친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안의사도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처사에 분개하여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구국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에 대한 아버지의 한이 하늘같이 높은데 그 한 가닥도 풀어드리지 못한 내가 어찌 감히 백락지장을 즐길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맹세코 우리 대한이 독립하고 외적이 물러나 2천만 겨레가 이 땅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의사는 그 맹세를 지켜 그날 이후 죽을 때가 그토록 즐겨왔던 술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1906년 일부 가산을 정리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통감정치로 인해 안의사는 무장투쟁으로 변신하게 된다.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하나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 국내에서의 투쟁에 한계점을 느낀 안의사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나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29세였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의병투쟁으로 성과를 이루지만, 만국공법와 인도주의에 따라 포로로 잡는 일본군을 석방해준다. 그러나 이때 풀려난 포로들에게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되는 바람에 일본군의 추격을 당하게 되고 결국 패퇴하여 한 달 여의 사투 끝에 겨우 연해주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엔치아에서 단지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단지동맹에 참여한 12인은 안중근,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지홍, 김백춘,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였다. 단지동맹 12인을 상징하기 위해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12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제 3전시실은 역사를 뒤흔든 여섯 발의 총성, 하얼빈 의거와 안중근의사의 법정투쟁과 옥중에서 남긴 글과 유언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플랫홈에 멈추고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지 20여분 후 이토와 수행원이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면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출영객들부터 인사를 받던 순간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중근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저격직후 러시아 헌벙들이 덮쳐 넘어졌던 안의사는 곧장 다시 일어나 힘찬 목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토의 죽음은 온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일본 주요 신문들은 호외를 발행해 청천벽력과 같은 그의 죽음을 전했지만, 국내외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은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국내 일부 친일파들은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문하고 사죄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고 한다. 이눔의 친일파들이란.

 

"일본이 비록 백만의 군사를 가졌고, 또 천만문의 대포를 가졌다 한들 이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무엇이 더 있을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한번 죽으면 그만인 목숨인데 이미 죽기를 각오한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심문이 강압적으로 번해도 안의사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1910년 2월 7일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는 뤼순 관동도독부 법정에서 모두 다섯차례의 공판을 받는다. 마지막 공판에서 안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오,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의거의 성격을 당당히 밝혔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오해하여 살해한 흉한의 소행인 것으로 몰아붙이고자 했다. 그러나 안의사는 불법적으로 심문과 재판을 진행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의거의 의의를 이렇게 밝혔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32년의 짧은 생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독립이 됐지만, 우리는 안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고 일본인 손에 의해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가족에게 인도될 경우 안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일제의 간악한 의도 때문이었다. 해방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다. 그래도 하늘에서는 다 보고 계시겠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분들이 모여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뭐라고 하실까?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나라가 이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하실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체험 전시실도 있다.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아이가 아니라서 꾹 참았다.

 

그리고 추모실이 있다. 꺼지지 않은 촛불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조지훈의 시가 있다. 여기서 나는 잘 참아왔던 눈물을 그만 놔주었다.(사진 촬영을 못해 안중근의사 동상으로 대체).

 

안중근의 찬(讚) / 조지훈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성낸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무잎도 우수수

한 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세월은 말이 없지만

망각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서 가지만

 

그 뜻은 겨레의

핏줄 속에 살아 있네

그 외침은 강산의

바람 속에  남아 있네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자, 안의사는 "일본에는 사형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고를 할 수 있었음에도 공소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가 의병장다운 기품을 잃지 않고 공소권을 포기하는 데는 어머니의 성원이 있었다. 면화를 가는 두 동생편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 라는 말을 전함으로써 모친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의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기념관에서 받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를 참고하면서 글을 썼다. 여기에 쓸데없는 내 느낌을 더한다는게 너무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제발 내년 혹은 몇 년 후 그분의 유언을 받들 수 있는 그 날이 제발 왔으면 좋겠다. 끝으로 당신이 있어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너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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