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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만 되면 사이렌이 울렸고, 모두 일어서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태극기를 바라봐야 했었다. 바로 국기하강식이다. 1989년 1월에 폐지가 됐는데, 26년이 지난 지금 다시 국기하강식을 한다고 한다. 이유는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란다. 글쎄, 강제적으로 한다고 애국심이 높아질 수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던 1919년 3월 1일은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됐을거 같다. 애국심은 강제로 억압적으로 한다고 되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기를 게양하지 않더라고, 내 나라에 대한 뜨거운 마음만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애국심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심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삼일절 시리즈를 기획했다. 백범 김구 기념관을 시작으로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 등이 잠들어 계신 효창원(효창공원), 안중근의사 기념관, 백범광장, 경교장 그리고 윤봉길의사 기념관까지, 역사책으로 봤던 그분들을 만나고자 떠났다. 그런데 오늘의 모습을 그분들이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뭐라고 할까? 그분들이 원하던 대한민국은 오늘과 많이 다를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소니 nex-3n으로 촬영)

 

백범 김구 기념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 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나와서 바로 직진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아 5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된다.

 

250미터 남았단다. 반 정도 왔으니 열심히 걸어가자. 곧 삼일절이라 그런지, 길가에 태극기가 많이 보인다.

 

건널목이다. 백범 김구 기념관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가면 된다. 이정표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나 길을 건너 직진을 해도 된다. 기념관 보다는 효창공원을 먼저 만나게 되지만, 큰 상관은 없다.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처음 왔으니, 이정표대로 왼쪽 길로 들어갔다.

 

250미터 남았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꽤 멀다. 더구나 계속 오르막길이고, 초봄같은 날씨에, 혼자만 목도리에 뚜꺼운 패딩점퍼까지 밖에서 돌아다닐 생각으로 과하게 입고 나왔더니 땀이 난다. 그런데 이 땀이 옷 때문인지, 나의 애국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땀을 식힐 겸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쳐다보니, 거대한 효창운동장의 조명탑이 보였다.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 그 의미를 몰랐을때 별 생각을 안했는데, 알고 보니 화가 났다.(자세한 내용은 다음회에서...)

 

드디어 도착을 했다. 그런데 기념관 입구 앞에 왠 쓰레기. 이런 건 빨리 좀 치우시지.

 

백범 김구 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선생(1876~1949)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 발전 시키키 위해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을 했다고 한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백범 김구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분단된 조국의 자주 민주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라고 한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앞에는 효창운동장이 있다. 더불어 저 멀리 남산도 보인다.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

백범 김구 기념관의 관람료는 무료다. 기념관 내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1번 전시관이다. 관람시 2시간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기념관에 들어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전시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안된다. 전시자료와 시설의 보호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사진촬영이 가능한 곳도 많은 요즘 제한을 풀어줬음 참 좋겠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그 덕에 눈으로 가슴으로 더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나왔다. 울컥한 순간이 너무 많아서, 내내 훌쩍거렸다.

 

태극 문양이겠지. 전시관 벽면에 있다. 나의 훌쩍거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태극문양만 봤을뿐인데, 왜이리 코끝이 찡해지던지.

 

전시관에 들어가기 전, 까치 한마리가 보였다. 한참을 울더리 나무가지 하나를 물어서 나무 위로 날아갔다. 그 나무 위에는 새끼새는 아닌거 같고,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부인 까치가 있었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 일하는 아빠 까치를 보자 또 울컥했다. 이거 분명 코감기때문일꺼야~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직원분이 안내를 해준다. 이때 들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촬영이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듣자마자 드는 생각은 사진도 못찍는데 괜히 왔~~ 하다가 고쳐먹었다. 내가 여기 온 진정한 이유는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촬영이 되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직원이 주는 백범회보와 리플렛 그리고 나의 소원이라는 작은 책자를 들고 1층에 있는 전시실로 들어갔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여기는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태극기를 참 많이 보고 살았지만, 여기서 보는 태극기는 왜이리도 슬프고 아프던지. 이건 코감기가 아니라, 내 안에 뜨거운 애국심이라고 해야겠다. '당신이 있었기에 제가 태어났고,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당신이 진정 원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여전히 아니네요. 우리는 언제쯤 통일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을까요? 그 답을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

 

전시실에 들어가자 마자 보였던 글이다. 요즘 높은 분들 중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 다 나 먼저, 내 배고픔 부터, 그 다음은 우리 자식, 뭐 이러지 않을까 한다. 하긴 나도 그럴테니깐 말이다.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은 단지 아름다운 나라만을 바라셨다. 동화 위인전을 시작으로 백범 일지까지 책은 참 많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어린 내가 바라본 김구 선생과 지금의 내가 바라본 김구 선생은 너무 달랐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받친 위인으로만 알았던 어린 내가, 이제는 죄송함(?)이라고 해야 하나? 왜이리도 가슴이 먹먹하고 아플까? 나라는 찾았지만 여전히 반쪽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 받친 분들보다는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만 잘 살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에 더더욱 아팠다. 당신들의 죽음이 제발 헛되지 않았다는 걸 우리 후손들이 증명해 드려야 하는데, 지금도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

1층 전시실은 백범 김구 선생의 탄생과 유년기, 동학, 의병활동, 치하포 의거 그리고 구국운동으로 나눠 사진과 영상, 그림 그리고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오면 참 좋을 거 같다. 특히 유년기 시절 일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는데, 여느 아이들처럼 개구장이 김구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직접 갈 수 없다면 홈페이지에서 관람하면 된다. 홈페이지에서 이미지 번호를 클릭하면 작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볼 수 있다.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 바로가기

 

사진을 찍을 수 없어 금방 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관람객이 난 혼자라 영상자료를 하나하나 다 보면서 천천히 김구 선생의 모습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1층은 조금씩 웃을 수 있었는데, 이젠 아픔만이 가득한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

2층은 연도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김구의 가족, 김구와 한인애국단, 추모의 공간, 한국광복군, 광복과 남북분단, 남북협상, 서거, 백범일지의 출간 등으로 되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미니와 안창호의 발의로 결성된 비밀결사인 신민회(멤버-이동녕, 양기탁, 이화영, 이승훈, 이갑, 박은식, 안태국, 안창호, 전덕기, 김구, 신채호, 이동휘, 차지석) 그리고 한인애국단 시절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잇다.

 

특히 윤봉길 의사는 본인의 새 시계를 김구 선생에게 드리면서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그때 그 시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의거를 일으킨 배후로 지목됐고, 일본은 60만원이라는 현상금 내걸었다고 한다. 2002년 화폐가치로 따지게 되면 60만원은 198억이라고 한다. 2015년이라면 200억은 넘겠지.

 

2층 전시실 추모의 공간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촬영을 하면 안되지만, 내부가 아닌 밖의 모습이라 괜찮겠지 생각하고 담았다. (만약 안된다고 하면 삭제하겠습니다)

 

경교장 그리고 안두희 그리고 이승만.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서거 후 40년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 활동에서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친일파와 반통일세력 그리 고 당시 정권 수뇌부에 의해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된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홈페이지)>

 

역사에는 IF, 만약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됐다면, 아니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첫번째 대통령이 됐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분명 지금의 모습은 아닐거라고 확신한다.

 

모든 관람이 끝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니,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나온다. 백범일지를 다시 보고 싶다면 여기서 구입하면 된다.

 

삼일절이 며칠 안 남았다. 넓은 전시실을 나홀로 관람할 수 있어 좋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 기념관에서 받은 나의 소원이라는 작은 책 첫페이지 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다음 베스트 두둥~(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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