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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공원, 참 많이 듣고, 참 많이도 말한 곳이다. 도산공원이 어디에 있고, 근처 맛집이 어디에 있으면, 방송에 나온 레스토랑에, 어느 연예인 단골집까지 다 꿰뚫고 있지만, 막상 도산공원을 가본 적은 별로 없다. 늘 근처에서, 늘 이정표로만 사용했던 곳이었다. 예전에 친구가 늦게 온다는 말에 잠시 산책삼아 공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냥 도심 속 작은 공원으로만 여겼던 이 곳이,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관과 묘소가 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어쩐지 도산, 도산, 도산... 어디서 많이 들어본거 같았는데, 그저 공원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 자신이 역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몇 년 전, 기념관과 묘소를 갔었지만, 이번에 또 한번 그때와는 마음가짐이 다르기에 양재에서 강남으로 점프했다.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선생이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자 조성되었다고 한다. 서울시에서는 1973년 11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도산 선생의 묘소를 이곳에 이장하는 동시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했다. 도산공원에는 도산 선생 내외분의 묘소와 기념관, 기념비, 동상, 말씀비, 기념조형물 등이 있다.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기념관이 있고, 직진으로 끝까지 가면 선생의 묘소가 있다. 도심 속 작은 공원이지만, 운동기구도 있고 걷기 코스도 있으며, 나름 알차게 공원답게 잘 꾸며져 있다. 더불어 도산 안창호선생에 대한 모든 것들도 함께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잠깐, 같은 공원이며 애국선열지사의 기념관과 묘지가 있는 곳인데, 왜 효창공원과 도산공원은 이렇게나 다를까? 도산공원은 묘소도 기념관도 늘 개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원의 모습도 잘 갖춰져 있다.

효창공원은 공원의 모습은 잘 갖춰져 있지만, 그에 비해 애국지사의 묘소는 늘 개방되어 있지 않다. 도산공원은 한분만 모시고 있고, 효창공원은 많은 분들을 모시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물론 효창공원이 도산공원보다 훨씬 크고 넓다. 그래도 두 곳 다 공원인데, 왜이리도 다른지 궁금해진다.

 

나혼자 알아 낼 수 없는 궁금함이기에 접어두고, 기념관부터 보기로 했다. 

 

대체적으로 6시까지 하는 기념관이 많은데, 여기는 오후 4시까지다. 시간을 꼭 확인해야겠다. 자세한 내용은 도산 안창호기념관 홈페이지.

 

도산 안창호선생을 만나러 갑니다.

 

로비에서 만난 도산 안창호선생의 흉상.

 

스탬프를 찍는 곳이 있다. 4개 스탬프가 각기 다르게 나오므로, 다 찍어봐도 좋을거 같다.

 

기본적인 팜플렛과 만화로 만나는 안창호 선생 이야기 등등 읽을거리가 다른 곳에 비해 많다. 무료이니 한부씩 가져가면 된다.

 

로비에서 만난 직원에서 전시실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안되죠라고 당연하지만 그냥 한번 물어봤다. 그런데 사진촬영이 된단다. 대신 플래시는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아직까지 사진촬영이 가능한 곳을 만난적이 없었는데, 도산안창호 기념관은 가능하구나 했다. 그런데 사진촬영이 된다고 했지만 이상하게 많이 담지 못했다. 가슴이 먼저 찍는 바람에, 그저 전체적인 모습들만 찍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도상 안창호 선생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큰 사진은 1920년대의 모습이며, 마지막 줄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모습이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7리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과 유학을 공부했다. 도산이 16세 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양 시내를 보면서 도선은 청과 일본이 이 땅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조국과 민족의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밀러학당에 입학애 3년간 신학문을 공부하며 기독교에 입교한 도산은 1897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3년간 경기, 황해, 평안 각도를 순회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1899년 고향에서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세우고 황무지 개간사업을 벌였다. 

3년간 교육사업에 열중했던 도산은 본격적으로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고 한다. 1902년 9월 부인 이혜련과 함께 떠난 도산은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에서 자긴의 미래를 보듯 자기의 호를 직접 도산이라 지었다고 한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 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역시 멋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애국선열분들을 모두다 명필에 언변도 참 좋았던 거 같다. 악필인 나는 이분들을 절대 따라할 수 없을거 같다. 악필이 아니어도 절대 따라 갈 수 없겠지만 말이다.

 

전시실은 1층으로 되어 있고, 성장과 구국활동 / 미주활동기 / 임시정부 활동 / 대독립당 활동 / 국내활동과 과거 등으로 되어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가족 사진과 함께 편지와 일기와 같은 유품과 유물들이 있다.

 

1917년 멕시코로 떠나기 전의 가족 사진이다

 

『1902년 10월 샌프라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포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보면서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개선 지도가 더 시급함을 깨달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과 함께 결성한 한인친목회를 미국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시켜 재미한인동포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소식을 들은 도산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1907년 국내로 귀국했다. 즉시 이갑,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전덕기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교육, 산업, 언론 등 다방면의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도산은 신민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면 근대민족운동을 지도했다.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도산을 배후 혐의로 체포하고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국내활동이 어려워 망명한 도산은 중국 청도에서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재러 한인사회를 지도하고 북만주 밀산의 봉밀산 독립운동기지를 돌아본 후 시베리아, 독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1913년 도산은 민족운동을 담당할 중견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서 5월 상해에 도착한 후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고 헌법과 법률을 제정 검토하고, 국내외 연락망인 연통부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또한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대한민국 적십자회 결성,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설립을 추진하는 등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접한 도산은 이를 독립운동단체 규합의 적기로 보고 유일당 원칙에 찬동하는 각 단체만을 규합하여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 최초의 정당조직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옆에 있는 책장은 1920년대에 도산선생이 직접 사용했다고 한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일어난 4월 29일, 도산은 소년동맹단에 기부금을 내기로 한 약속을 기키기 위하여 상해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을 방문하던 중 교민단장을 체포하러 온 일본과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2년 6월 국내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은 도산은 4년 실형을 언도 받았고, 대전감옥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1935년 2월 가출옥하였다.

국내 흥사단 조직인 수양동우회가 발전한 동우회는 1931년 이후 민족주의 계열로써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제는 동우회가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집요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고 단정하고 탄압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동우회 이사회 소집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중 1937년 6월 동우회 회원들은 일제에 의해 총 검거 당하였다.

고향 근처 대보산 송태산장에서 체포당한 도산은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8월 15일 예심 종결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도산은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환으로 위급한 상태에 빠졌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2월 24일 서둘어 도산을 보석시키고 경성 제국대학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도산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3월 10일 60세 일기로 운명했다.』

 

아쉽다. 7년만 살아 계셨더라면, 조국의 광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너무 아쉽다. 기념관 외부 벽에는 도산공원에 대한 히스토리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나와 도산 안창호선생이 계신 곳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도산의 말씀비다.

 

묘소에 가기 전에 만난 현수막, 오늘 오전 11시에 도산 안창호선생 순국 제77주기 추모식이란다. 참석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묵념의 시간을 갖으면 어떨까?

 

도산 안창호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가까이에서 촬영하는 건 예의가 아닐거 같아, 떨어져서 담았다. 촬영하기 전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묵념을 드렸다.

 

묘소에서 나와 조금 걷다보면, 도산 안창호선생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있어, 오늘 제가 있는 것이고, 우리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겠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도산기상이다. 이는 자주 정신 / 진리 정신 / 협동 정신 / 개조 정신 / 애국 정신을 뜻한다.

 

공원답게 걷기 운동 코스가 잘 만들어져 있다. 효창공원도 물론 잘 되어 있었다. 공원으로써 나무랄데 없었지만, 애국지사 묘소기 개방되어 있지 않아 서운했었다.

 

공원이니 잔디밭도 있고, 강아지도 뛰어 다니고, 야외촬영하는 신랑신부도 있고, 따스한 봄날이 온거 같다.

 

효창공원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운동기구도 있다. 같은 공원인데, 애국지사에 대한 두 공원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효창공원도 도산공원처럼 공원과 애국지사 묘소가 함께 상생하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도산공원이라고 말할때, 이 곳이 그냥 공원이 아니라 도산 안창호선생이 계신 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따라 나의 발걸음은 양재에서 강남을 거쳐 광화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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