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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숙명 | 보이지 않는 실로 엮인 운명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엄청난 몰입감이 있다. 처음이 힘들지,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바로 결론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보니 그의 소설만 벌써 15권이나 읽었다. 예전에는 추리소설 위주로 읽었는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기점으로 잔인한 살인보다는 감동을 주는 장르를 선호하게 됐다.  

 

전자책(리디북스) 발행이 2020년이라서 최신작인 줄 알았는데, 숙명은 199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야심을 갖고 도전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과학, 수학 등 이과적인 부분이 많이 나온다. 왜 그런가 했더니,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전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취직을 했단다. 숙명에서는 뇌의학이 중요 소재다.

 

숙명의 사전적 의미는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이라고 한다. 왜 제목이 숙명일까? 뇌의학에 이어 살인사건까지 숙명과는 무슨 관계인가 했다. 그 의미는 결론부분에서 밝혀지는데 스포이니 여기서는 그만.

 

"사나에는 항상 그 넓은 부지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머리에 쓴 하얀 스카프와 하얀 앞치마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어딘가 인형을 연상시키는 뽀얀 피부의 얼굴이었다.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유사쿠는 사나에를 누나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엄마와 아들만큼 차이가 났을지 모른다." (본문 중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엄청난 떡밥이 숨어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블로그에 리뷰를 하기 위해 책을 읽으면서 중요 부분은 체크를 한다. 유사쿠와 사나에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줄 알고 그저 표시를 했을 뿐인데, 지금 다시 보니 엄청난 떡밥이다.

 

사나에라는 인물은 죽고, 어린 유사쿠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형사가 된 유사쿠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였던 아키히코가 등장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용의자 혹은 범인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키히코의 아내 미사코에게 유사쿠는 첫사랑 남자다. 이들의 관계만으로도 막장 스토리인데, 반전을 알게 되면 더 막장스럽다.

 

"마사키요 씨가 돌아가셨대요 살해당했대요." 순간 침묵이 온 방을 감쌌다. (중간 점프) 화살이었다. 총 길이는 약 40센티미터, 지름 약 1센티미터, 본체는 알루미늄으로 보이는 금속으로 화살깃이 후반부에 세 장 붙어 있다. 그런 진짜 화살이 미사키요의 등에서 왼쪽으로 10센티미터 되는 곳에 꽂혀 있었다. (본문 중에서)

살인에 사용된 석궁은 아키히코 집에 있던 물건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취미로 모은 수집품 중 하나로, 석궁과 3개의 화살깃이 있고, 그중 하나는 독화살이다. 그 독화살에 사람이 죽었으니, 용의자는 당연히 아키히코 집안 사람으로 의심을 하게 된다. 유사쿠는 신참은 아니지만, 직급이 그리 높지 않다보니, 단독 수사보다는 선배의 지시하에 움직인다.

 

그런데 그가 단독 수사를 하게 되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다. "녀석은 어릴때부터 장어를 무척 싫어했어. 그런데 굳이 그런 메뉴를 주문한 건 뭔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아?"(본문 중에서)

어릴적 기억으로 범인을 잡다니, 이래서 둘의 관계를 라이벌로 설정했구나 했다. 하지만 유사쿠는 아키히코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살인사건 너머에 있는 진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사나에의 죽음이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촉이 왔기 때문이다.

 

"중증 뇌전증 환자 치료법으로 좌우 뇌를 잇는 뇌량을 절단 하는 수술이 있죠. 그런 사람을 분리 뇌 환자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다면 수술할 때 자른 그 뇌량은 왜 머리에 존재하는 걸까요. 그래서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뇌와 좌뇌에 다른 의식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거죠." (본문 중에서)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에하라 박사의 연구는 전쟁이 끝난 직후라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단 한사람 우류공업 창시자 우류 가즈아키가 관심을 보이면서 연구를 다시하게 된다.

 

"우류공업 사내 진료소에서 뭔가 연구를 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건 뇌의학 연구자인 우에하라 마사나리 박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 연구에는 몇 명의 피실험자가 필요했어요." (본문 중에서)

범인은 아키히코라고 진작에 밝혀졌으니, 이제는 피실험자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어른인데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사나에는 피실험자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6명의 인물이 더 있다. 그중 한명은 우류가의 며느리가 된 미사코와 연관이 있다. 살인사건 너머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숨어 있었다니,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저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 않을텐데 했는데,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야기는 후반부에 엄청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범인을 너무 쉽게 알려줬구나 했는데, 진짜 범인이 나타나고, 그 범인은 또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가 했는데, 또 엄청난 반전이 남아 있다. 아키히코와 유사쿠가 글쎄..

 

"어디선가 우에하라 보고서를 갖고 와서 할아버지에게 논의를 한 거야. 만약에 뇌 속에 정밀 부품을 심을 수 있다면 외부에서 전파를 보내서 감정도 조작 가능하지 않겠냐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지면 어떤 상대든 스파이로 만들 수 있다고......" (본문 중에서)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조작(전뇌식 심동조작 방법)한다. 1990년에는 판타지같았는지 몰라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둔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어디선가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허구인지 몰라도, 지금은 왠지 현실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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