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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석파정

가을이 왔구나 했는데 어느새 만추다. 여름내내 다양한 녹색빛깔을 뽐내던 나뭇잎은 겨울을 앞두고 울긋불긋 화려한 꽃잎이 되었다. 예년같았으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텐데, 코로나19로 인해 포기를 먼저 배웠다. 하지만 여기만은 포기할 수 없다. 서울인데 서울같지 않은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듯 잠시나마 조선시대로 떠났다.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이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터널을 지나 바로 내리면 된다. 길을 건너기 전, 맞은편 건물을 바라본다. 지금은 확실히 서울하늘이고, 현재 2020년이다. 하지만 잠시 후, 시간여행자가 되어 조선시대로 떠날 거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맘씨 좋은 친구를 만난 후 함께 떠날거다.

 

밖에서 보이는 건물은 서울미술관이다. 석파정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밖으로 나가면 된다. 차소리 가득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적막강산이다. 좀전까지 서울사람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조선시대 마님(?)이다. 그렇게 상상을 하고 싶은데, 사진과 달리 주변에 사람이 많다. 일부러 오픈시간(11시)에 왔는데도, 사람이 많다니 코로나19로 인해 멀리갈 수 없어서 가까운 석파정을 찾은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남들과 다르게 다녀야 할 거 같다.

 

 사랑채

소수운련암각자, 석파정을 짓기 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위다. 바위에 새겨진 글귀는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소수운련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 암석 위에 있는 석탑은 신라시대 삼층석탑이다. 원래는 석탑이 마지막 코스인데, 이번에는 첫번째 코스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다르게 가기 위해서다.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풍경. 도너츠처럼 생긴 작품이 있는 곳이 서울미술관 옥상이고, 석파정으로 가려면 건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조선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의 별서(별장)였지만, 이곳을 맘에 들어한 흥선대원군이 본인의 별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임금의 아버지였으니, 그정도의 갑질(?)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나였어도 그런 능력이 됐다면 빼앗고 싶었을 거 같다. 

 

유독 도드라지게 변한 단풍. 이게 바로 시선강탈이어라. 그나저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 오길 잘했다 싶다. 

 

사랑채 위에 있는 건물은 별채로, 끝방은 고종이 기거했던 방이다. 별채에서 바라보면 현대적으로 변한 부암동이 보이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진짜 조선시대에 온 듯하다. 

 

올 여름 비가 많이 오더니, 낙엽이 그리 예쁘지 않다. 가을은 매년 찾아오지만, 가을은 매년 다른 모습이다. 작년에도 올해도 비슷한 시기에 왔지만, 이번이 살짝 이른감이 있는 거 같다. 다음주에 오면 더 좋을까?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지금 모습에 만족하며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빨갛게 물든 나뭇잎
노랗게 물든 나뭇잎

석파정은 맥문동 군락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다. 이걸 알면서도 보라빛 맥문동을 놓쳤다. 내년에는 맥문동 필 무렵에 꼭 다시 오리라.

 

남들과 다른 동선으로 걸으니 한적한 가을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또 있나보다. 그들이 먼저 가길 기다렸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이런 그림은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거다. 왜냐하면 자연이 그린 그림은 사람이 그린 그림과 그 결이 다르니깐. 

 

나뭇잎에 가려져 있지만, 저곳이 석파정이다. 움직임이 빨라서 찍지 못했지만, 잠시 청설모를 만났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할일을 하더니 휙 사라진다.

 

자연이 만든 핀조명을 제대로 받은 청단풍

바람은 서늘하지만 햇살은 따스하다. 이렇게 멋진 가을을 올해는 많이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제대로 가을을 맞이하고 싶다. 떠나는 가을을 지금은 붙잡고 놓아주고 싶지 않다.

 

너럭바위(코끼리바위)

코끼리바위는 인왕산이 바위산이라는 증거로, 인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수려한 자연석조물이다.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져 있는데,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어 득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고 한다. 그럼 "제 소원은요?"

 

햇살은 계속 나만 따라와~

석파정이 왜 석파정인지, 석파정을 보면 알게 된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자 아래 물이 있지만, 흐르지는 않고 고여있다. 그래서 여름에는 오면 모기와의 전쟁을 치뤄야 한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에 오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내년 여름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지금을 즐기고 있다. 가을은 첫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기에, 가을은 가을이라서 그저 좋을 뿐이다. 

 

천세송

위풍당당 천세송이다. 봄에도 여름에도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도 여전히 진한 녹색잎을 뽐내면서 석파정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을 거 같다. 

 

삼계동각자

별채에 들어가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석파정 곳곳에는 벤치가 많으니,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혼자 왔다면 멍때리면서 시간을 보냈을텐데, 둘이 오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된다. 혼자도 좋지만, 둘도 좋다는 거 오랜만에 느껴본다.

 

석파정이 오면 좋은 점은 정자나 사랑채 등 건물보다는 자연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고궁을 좋아하는데, 그곳에 가면 나도 모르게 자연보다는 건물에 집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석파정에 오면 건물보다는 자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더더욱 이곳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별채

사람이 많아서 그리고 자연이 더 느껴야 하니 건물은 잠시 지나가는 걸로.

 

서울미술관 옥상공원

가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 같다. "아직 가을을 즐길 시간은 충분하니, 만추에 흠뻑 빠져보세요." 코로나19로 인해 멀리 갈 수 없지만, 서울에도 가을명소가 꽤 있으니 11월에 또 떠나야겠다.

 

가을은 깊어가고, 감은 익어가고, 지금은 가을ing.

 

이중섭의 황소

석파정의 가을은 올해로 두번째다. 내년 가을에도 어김없이 찾을 거 같은데, 그 전에 눈 쌓인 석파정을 만나고 싶다. 눈과 맘이 즐거웠으니 이제는 입과 맘이 즐거울 차례다. 부암동에 오면 먹을 곳이 많은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니 둘이서 치맥하러 계열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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