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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구나주역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나주역사

경화역 폐역은 벚꽃, 구남원역은 양귀비꽃, 화랑대 폐역은 경춘선 숲길 등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폐역이 참 많다. 그중에서 단연코 으뜸은 구나주역이라 생각한다. 예쁜 꽃이 있어서, 멋진 숲길이 있어서, 고즈넉한 기찻길을 걸을 수 있어서... 전부 틀렸다. 3.1 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식민지 시기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역시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사람이다.

 

나주목사내아에서 구나주역까지 택시를 탈 계획이었지만, 지도앱을 확인해보니 거리가 1.5km라 나온다. 요즘처럼 심각하게 더울때가 아니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남고문은 차로 이동을 했다면, 놓쳤을 거다. 남고문 광장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1980년 5월 21일부터 나주 시민군의 주요 거점지로, 시위대 및 시위 차량들이 집결해 각각의 임무를 부여받았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 모인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김밥, 주먹밥, 음료수 등을 시민군에게 무료로 제공했고,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시민군들이 주야로 경계근무를 섰던 곳이다. 광주송정역에서 나주역까지 KTX로 약 8분이 소요된다. 이웃동네이니, 그날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함께 했을 것이다. 

 

심각하게 더운 건 아니지만, 여름은 여름이다. 습한 날씨로 인해 물을 먹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수분 가득이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불어오지만, 바람으로 인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떨어질 줄 모른다. '아~ 택시를 탈 걸.' 왜 걸어왔을까 자책을 하려는데, 딱 아니 슬쩍 봐도 목적지가 확실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21세기였는데, 갑자기 20세기가 된 거 같다. 지난 봄에 갔던 화랑대폐역은 경춘선숲길로 인해 화랑대 역사관이 되면서 개보수를 했는데, 구나주역은 시간이 멈춘 듯 엣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거 같다. 관련자료를 보니,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한 근대건축물이며, 역사의 기본 구조나 골조 목재 등은 초창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신 나주역이 생기면서 구 나주역으로 폐역이 됐지만, 이곳은 살아남았다. 건물 자체가 주는 멋스러움도 있겠지만,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복고풍이 아니라 그냥 복고다.
외관에 이어 내부까지 오호~ 소름
열차표를 판매하는 안쪽 공간은 못들어감.
아날로그 느낌 지대로~
승차권 구간을 표시하는 구간도장 / 차표 한장 손에 들고~ / 통행을 허락하는 통표

구나주역의 역사적 의미도 무지 중요하겠지만, 우선 "정말 쩔어~"(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느낌을 살릴려면) 레트로에 뉴트로까지 요즘 복고 감성이 대세인데 여기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페인트는 새로 한 듯 하지만, 나머지는 예전 느낌 그대로인 거 같다. 특히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는 옛날옛적에는(나주역사는 1960년대 모습으로 연출) 어느 역에 가도 다 있었을텐데, 어느새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지다보니 참 낯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겹고 애틋하기도 하다. 기차표를 판매하는 안쪽 공간 역시 보존이 잘 되어 있던데, 들어갈 방법을 몰라 창문을 통해 슬쩍 바라만 봤다. 

 

대합실 (인물사진 아님, 가방 사진)
기차표에 상처를 내는 순간

나주에서 서울까지 새마을호는 37,500원(특실)과 30,300원(일반실)이며, 무궁화호는 25,100원(특실)과 20,400원(일반실)이다. 기차표를 구입한 후, 대합실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덜컹 덜컹 기차소리가 들리면, 혹시 내가 탈 기차가 아닌가 싶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을 것이다. 아님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오면, 어느새 다른이가 앉아 있다. 이때 "이거 내자리오, 일어나시오."라고 말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을 거 같다. 때가 되면 역무원 아저씨가 다 알려줄텐데, 급한 성격이 문제다. 기차가 도착하고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보여준 후, 드디어 밖으로 나간다. 지금은 문이 잠겨있어 플랫폼으로 나갈 수 없지만, 그때는 광주, 순천, 서울, 부산, 진주 등으로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떠났을 것이다.

 

간첩을 신고하면 20만원 상금탄다.

구나주역에 온 진짜 이유를 만나러 갈 시간이 됐다. 지금까지는 프롤로그였을 뿐이다. 나주역사의 참모습은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가야한다. 왜 이곳을 보존해야만 했는지, 90년전 그날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찍었어야 했는데...

1923년 북쪽벽에 화물창고 4평을 증축했다고 하던데, 아마도 여기가 아닐까 싶다. 기차를 탈때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지만, 기차에 내려서는 역사 밖에서는 작은 문으로 나왔을 거 같다. 

 

나주역사 왼편으로 째깐하게 보이는 건물로 간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경 나주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54개교 5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학생독립운동을 만나러 간다. 90년 전 우리 선배님들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고로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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