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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속내가 뻔히 보이는 그네들의 농간을 그냥 묵과할 수 없다. 90년 전 우리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학생을 그냥 묵과했더라면,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비를 걸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빙다리 핫바리로 보일 뿐이다. 붙어보자는데, 맞짱은 당연지사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난 1929년은 2019년 우리에게 쫄지마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같다.

 

구나주역 바로 옆으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왜 나주역사를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까? 그 정답을 알려주는 곳이다. 부끄럽지만,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나주역은 나주 3·1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확히 안다. 1919년이 아닌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퍼져나갔다

 

제1, 2전시실로 되어 있으며, 관람 순서는 2층에 있는 제1전시실부터다. 현재 여기는 1층. "모든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참고로 관람료는 무료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의 애국심으로 무너진 민주공화국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제1전시실 민족항쟁의 땅, 나주

호남지방에는 나주평야와 호남평야라는 좋은 땅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런 곳을 가만히 둘 일제가 아니다. 호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쌀은 영산포에 모여 목포를 거쳐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는 영산포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를 세워 나주평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았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이민을 적극 유도해서 빼앗은 토지를 나눠주고 영산포에 정착하게 해, 나주 ·영산포 지역은 소수의 일본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특히 영산포는 마치 일본인 사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고 한다. 

 

통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나주역, 1929년 10월 30일 드디어 사건이 일어났다. 제1전시실은 나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제의 호남침탈과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나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그날의 역사는 제2전시실에서 시작된다.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같은 곳 그러나 다른 풍경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충돌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나주역에서 열차가 정차한 뒤 학생들이 내려 개찰구를 빠져 나오던 중, 일본인 학생들이 한 학생을 한국인 여학생들이 나가는 쪽으로 밀어 한 여학생과 부딪쳤다. 또다른 설은,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의 앞을 가로질러 갔다, 따라 다니며 희롱을 했다,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았당겼다 등이 있다.

한국인 남학생 박준채와 이순태 등 광주고보생 3~4명은 여학생들보다 몇 걸음 앞서 개찰구로 빠져 나갔는데, 뒤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나자 뒤를 돌아보고 격분하게 됐다. 박준채는 광주중학생 후쿠다 등을 불러, "너희들은 명색이 중학생이면셔, 여학생을 희롱하느냐"라 힐문하자,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고 되받았다. 박준채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을 바로 이말이었다.

이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준채는 후쿠다의 면상을 주먹으로 쳤고, 출찰구에 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가 쫓아와 박준채를 나무라면서 빰을 때렸다. 그 현장은 나주역 건물 안이었다. 박준채와 조선인 학생들은 왜 조선인 학생만 나무라느냐, 그리고 왜 빰을 때리느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 사이 일본인 학생들은 재빨리 현장을 빠져 나간 것을 보인다. 다음날 분함을 참지 못한 박준채는 열차 안에서 후쿠다 등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말다툼을 하다가 차장에서 훈계를 받게 된다.

 

박준채 그리고 이광춘, 박기옥
11월 1일 광주역

10월 30일 이후, 31일 통학열차안 사건, 11월 1일 광주역에서 한일 양측 학생들의 충돌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11월 3일 광주고보생 1차 봉기, 11월 12일 2차 봉기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11·3 학생독립운동 격문은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청년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고 싸우자.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재향군인단의 비상소집에 절대 반대한다. 경계망을 즉시 철회하라. 소방대 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만행의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기성의 학부형위원회를 분쇄하라. 학부형 대회를 소집하라.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봄까지 전개된 11.3학생독립운동은 전국에서 320개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거국적인 학생봉기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무려 350명이 검거되어 260여 명이 구속되었다. 퇴학당한 학생들의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투옥된 학생들은 옥중에서도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했다. 1930년 3월 1일, 수감 학생들이 감방 벽을 두드리는 신호에 의해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외치는 소리로 감옥은 떠나갈 듯하였고, 간수들은 혼비백산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더욱 철저한 감시와 학대 그리고 가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11.3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학생들의 처벌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채 가라앉은 듯 싶었다. 하지만 1930년 1월 9일 광주고보 2학기 시험에 백지동맹사건이 일어났다. 광주고보의 백지 동맹 주동자로 퇴학당한 이기홍은 "저는 불쑥 일어나 함께 공부하던 우리 애국 학생 200여 명이 감옥에서 혹한에 떨고 있는데 우리는 자신만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이 아픔을 못 본체하고 시험을 치를 수 없으니 불응하고 나가자로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전학생이 시험에 불응하고 나갔다."

 

나주 학생들의 11.27봉기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아는가? 우리들이 얼마나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 격문.

보라.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저들의 편협한 행동과 추악한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 사태가 학생사건이므로 학교당국에 맡겨 해결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사법관이 출동하고 경찰관이 출동한 것을 무슨 망동인가. 특히 우리 학생들만 다수 구속함은 얼마나 통분한 일인가. 우리들도 인간으로서 자유가 있다. 오늘 무엇 때문에 이러한 압박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들은 힘으로써 싸워 자유를 획득하자. 우리들의 무기는 단결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힘으로써 우리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함과 동시에 시위로써 대중의 각성을 촉진하자. 조선학생대중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고맙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학생독립운동의 의의는 식민지 시기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이자, 그 주역이 순수하게 학생들이었다.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은 해방과 함께 역사의 장으로 넘어간 듯 하지만, 1960년 4·19, 1980년 5·18, 1987년 6월 항쟁 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주역이다. 이제는 우리가 해야한다. 그 추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들었던 촛불의 온기를 기억하는 한,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 고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지지하며, 동참하고 있습니다.

 

"끌려가는 걸음 얼마나 무서웠나요. 돌아오는 걸음 얼마나 무거웠나요..." 나주 평화의 소녀상이다. 뒤틀린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게 우리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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