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듯~" 근대계몽기에서 해방기까지 한극근대문학관
분명히 처음 갔는데, 낯설지 않고 겁나 익숙하다. 건물 외관은 예전에 본 적이 있지만, 내부는 단연코 처음이다. 그런데 익숙하다 못해 머리가 아프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등장하는 작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듯하나, 시험범위가 아니라서 맘 편히 즐겼다.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관이다.
한국근대문학관 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전형적인 창고 건물로 물류창고, 김치 공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똑같은 창고 건물을 이어서 하나로 만든 듯하다. 첫 번째 건물에 적혀있는 시는 윤동주의 봄이다.
한국근대문학관은 1894년부터 1948년까지 근대계몽기에서 해방기까지 한국근대문학의 형성과 역사적 흐름을 다루고 있다.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근대문학이 어떻게 굴곡을 겪으며 성장해 왔는지 잘 나와있다. 그런데 왜 인천일까? 개항도시로서 근대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 인천이라고 한다.
1984~1910 왕조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열망 속에서 신문학의 씨앗을 뿌리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근대국가 건설의 기회가 되래하는 이 시기는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새롭게 전래된 근대 문명 속에서 내용상으로는 근대적 계몽을 강조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지만, 옛 문학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창가는 개항과 함께 수용된 서양식 악곡에 맞춰 제작된 노래로, 율격은 7·5조인 경우가 많았다. 서구 문명 및 과학기술의 찬양, 문명개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달성, 자유와 평등사상의 고취 등을 강조했다.
신소설은 전통 고전소설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고전소설과는 다른 사건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시간을 거슬러 서술한다거나 언문일치에 가까운 묘사체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시도했다. 자유종은 연설과 토론 형식을 활용한 신소설로 계몽적 내용과 민족국가 수립, 세태 비판을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역사전기물은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맞서 근대 문화에 대한 찬양보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강하게 내세웠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국한문체로 쓰였으며, 묘사가 거의 없어 사실성이 부족했다. 역사전기물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발행금지 처분을 받아 그 생명을 다했다.
(1910~1919 시기는 친일파의 작품이라서 건너 뜁니다.)
1919~1925 쳥년 시인들, 감상적 비애와 좌절을 토로하다
1920년대에는 3·1 운동 실패로 인한 좌절감과 현실도피 의식을 표현한 감상적 낭만주의 시가 주로 창작됐다. 이런 경향에는 3·1 운동의 실패 이후 보다 나은 미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식민지 조선 시인의 좌절감과 불안한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상화는 이 작품에서 식민지로 전략한 민족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비판을 기초로 해방된 민족의 미래를 정열적으로 노래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한국 시의 내용과 형식, 사상과 이념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전범으로 우뚝 선다.
김소월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이해하기 쉽고 익숙한 생활 언어로 풀어냈다. 특히, 전통적인 민요 가락에 기초를 두면서도 우리의 정서와 리듬에 잘 어울리는 자유시를 창작했다. 한용운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현진건은 식민지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의 궁핍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적절한 시점의 사용과 아이러니 기법(운수 좋은 날)을 통해 주제를 더욱 인상 깊게 부각함으로써 근대 단편소설 미학의 확립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지식인의 여행 과정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런 여행 경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했다.
김동인은 과거 시제 및 과거형 종결어미, 3인칭 대명사 등을 소설의 문장에 도입해 근대 소설의 기틀을 마련했다.
나도향은 초기에는 감상적 낭만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벙어리 삼룡이와 물레방아에 와서는 신분의 상하 관계에서 오는 비극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25~1935 농민의 애환과 농촌의 현실에 주목하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농촌의 삶과 애환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됐다. 김유정은 특히 농민의 삶과 생활에 주목해, 봄봄과 동백꽃 같은 우리 문학의 대표작을 내놓았다. 농촌 계몽운동을 주제로 한 심훈의 상록수와 이기영의 고향은 농촌문제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한국 노동소설의 원조는 한설야 / 식민지 현실에 대한 풍자의 진경을 보여준 채만식
1935~1945 일제 파시즘에 맞서 시대를 고뇌하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 한국 근대문학은 일본제국주의의 전면적 탄압에 직면한다. 1940년을 넘어서면서는 각종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키고 한글 사용도 금지시킨다. 문인들에 대한 일제 당국의 통제와 검열, 국가시책에의 협조가 강요되면서 일제 말기에는 친일문학을 표방하는 문인들도 생겨나게 된다.
1945~1948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며 새로운 민족문학으로 부활하다
해방으로 그동안 억압과 제한에 시달렸던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작가들은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 정서를 자유롭게 표출했으며, 친일문학의 청사과 새로운 민족문학의 건설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념을 중심으로 한 좌우의 대립은 많은 작가들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해방의 감격과 조국 건설의 의지,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문화의 창조를 강조한 시도 많이 발표됐다.
청록집은 우리 고유의 자연과 전통, 이를 향한 한국인의 그리움과 애정을 아름다운 한글로 담아냈다.
윤동주는 식민지 현실에 무기력한 자아를 반성하면서 고뇌하는 청년의 내면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서서, 쉽게 써진 시, 자화상 등이 대표작이다.
이육사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지사적 의지를 강한 목소리로 표현한 시인이다. 절정, 광야가 대표작이다.
이 시기의 소설은 친일 작가의 자기비판, 해방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귀환한 동포들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구분된다.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은 지식인의 자기반성과 고뇌를 내용으로 한 작품이다.
사람만이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으며, 언어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문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언어로 통한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사람들은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냈다. 우리 글과 말이 있어 참 뿌듯하고 행복하지만, 그 시절 이해가 아니라 암기로 이분들의 작품을 만난 건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다. 이제는 암기가 아니라 이해하면서 다시 읽고 싶다.
본관에서 엎어지도 코 닿을 거리에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이 있다. 본관도 그러하더니, 이곳 역시 1900년 전후 미쓰이 물산 인천지점으로 건립되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이동을 했는데, 아뿔싸 임시휴관이란다. 4월 29일부터 별도 안내 시까지라고 하니, 다음 인천 나들이는 휴관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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