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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김용의 녹정기 | 단연컨대 최강의 몰입감

중학교 이후로 끊었던 무협지를 다시 읽을 줄 정말정말 몰랐다.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을 읽고 있는데, 어느날 문득 김용의 녹정기가 있을까 싶어 검색을 했는데 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은 무겁지만 어려움 없이 태백산맥, 아리랑 그리고 한강까지 다 읽었다. 그런데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는 전반부는 어렵지 않았는데, 간도(5권) 부분에서 막혔다. 이상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더니, 2달이 넘도록 10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그때,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을 찾았고, 밀리의 서재에서 검색의 검색을 거듭하다 김용의 소설(무협지) 녹정기를 발견했다. 중학교때 이후로 끊었던 무협지는 다시 읽을까? 말까? 5분 정도 고민을 하다, 다운을 받고 읽기 시작했다. 아는 내용인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엄청 새롭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 빠지니, 헤어나올 수가 없다. 하루에 책 읽는 시간은 2, 영상을 보는 시간은 8이라면, 녹정기를 읽을때는 9:1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책을 봤다. 역시 김용의 무협지 특히, 녹정기는 단연컨대 몰입감 하나는 최강이다.

녹정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때문이다. 자고로 무협지라고 하면, 무림의 고수들이 대거 나와 자기네 문파가 최고라고 자랑을 한다. 그러나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는 무림의 고수가 아니다. 그가 잘하고 좋아하는 세가지는 거짓말, 노름 그리고 자신이 맘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만드는 기술이다. 소전, 방이, 아가, 증유, 목검병, 쌍아 그리고 건녕공주까지 위소보의 아내들이다.

 

[대청 앞에서 열두세 살가량의 어린 아이가 뛰쳐나와 고래고래 욕을 퍼부었다. "네놈이 감히 우리 엄마를 때려? 이런 똥물에 뛰겨 죽일 놈!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라고! 손등에 왕부스럼이 생겨 손이 썩어 문드러지고, 혀도 썩어 문드러져 그 고름이 목구명을 타고 배때기 속으로 흘러들어 오장육부까지 썩어문드러져라!" (1권 본문 중에서)]

무협지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참으로 부끄러운 인물이지만, 그는 어찌어찌해 황실에 들어가 가짜 내관이 됐고, 또 어찌어찌해 간신 오배를 죽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지회 청목당 향주가 되면서, 황상이 친애하는 청나라 내관이자 반청복명을 외치는 반란군(?)으로 극과 극의 인생을 살게 된다.

 

["지금 널 제자로 거두는 건 어쩌면 내 평생 가장 큰 실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사가 우선이니 모험을 할 수 밖에 없구나. 소보야. 좀 이따 너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 허튼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야 한다."
"저는 그냥 헛소리를 하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사부님은 자꾸만 허튼소리라고 하시니, 그건 좀 억울하지 않나요?" (2권 본문 중에서)]

오배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향주가 되지 않았을 텐데, 오배를 죽이고, 진근남의 제자가 되면서 위소보의 인생은 낮에는 청나라 관리로, 밤에는 천지회의 향주로 1인 2역을 하게 된다. 청나라 소현자에게는 충(忠)을, 천지회를 포함한 무림의 영웅들에게는 의(義)를 행한다. 

 

위소보는 자기보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사부님으로 모시고, 사부로 모시기에 나이가 어중간하면 의형제를 맺는다. 그런데 여성을 만나면, 사부와 고모를 제외하고 예쁘면 무조건 아내로 삼는다. 엄청난 무공을 가진 여러 고수를 만나 제자가 되지만, 그들에게서 배운 무공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내공을 쌓고 싶은 맘이 전혀 없어서다. 그래도 도망다니는 무공 하나만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배웠다.

[위소보는 거짓말을 해도 나름대로 원칙과 요령이 있었다. 자잘한 부분은 아무렇게나 엉터리로 꾸며내도 좋지만 대체적인 흐름과 윤곽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허실실, 긴가민가 하면서도 그의 말을 믿게끔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이건 그가 어려서부터 기루에서 뒹굴며 몸으로 직접 터득한 요령이었다. (7권 본문 중에서)]


[바로 그의 뒤에서 붙어서 있던 정극상이 느닷없이 암습을 전개한 것이다. 진근남의 무공이면 설령 정극상이 열 명이라 해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근남은 시랑이 다시 귀순할 것 같았는데, 정극상이 나서는 바람에 달아나자 너무 안타까웠다. 시랑 같은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 불러오려 했는데, 천만뜻밖에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던 정극상이 등 뒤에서 독수를 전개할 줄이야! (9권 본문 중에서)]

그에게 있어 첫 번째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진근남의 죽음은 엄청난 슬픔이었다. 능지처참(전신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도려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을 주는 잔혹한 형벌)을 해도 시원하지 않을텐데, 위소보는 정극상을 끝내 죽이지 못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대만을 청나라에 바치고 황제의 은총을 받아서다. 대신 그의 사부를 모십팔대신 죽게 만들었다.

 

[첫째는 오배를 죽었고, 두 번째는 노황야를 구했으며, 오대산에서 몸으로 검을 막아 황상을 구한 것이 세 번째 일이었다. 네 번쨰는 태후마마를 구해주었고, 다섯 번째는 몽골과 서장의 세력을 조정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여섯 번째는 신룡교를 섬멸했고, 일곱 번째는 오응웅을 잡아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 있다. 조양동과 장용을 추천해 오삼계를 평정했고, 아홉 번째로 야크샤를 공략해 러시아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지 않았던가!
"황제는 나더러 천지회를 멸하라고 하고, 천지회는 나더러 황제를 죽이라고 강요해 나더러 중간에서 어떡하라는 거야?"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다시 소리쳤다. "한쪽은 내 목을 치겠다고 하고, 한쪽은 내 눈을 후벼파겠다고 하잖아! 난 머리통이 하나고 눈깔은 두 개밖에 없어! 누군 목을 치고, 누군 또 눈을 후벼판다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야? 제기랄! 안 해, 다 안 해! 다 안하면 되잖아!" (10권 본문 중에서)] 

그동안 달려왔던 내용으로 봤을때, 결말이 살짝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위소보에게는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하는 돈이 있고, 예쁜 마누라가 7명이나 있다. 더이상 바랄 게 없을 테니 남은 인생 노름이나 하면서 보내도 나쁘지 않을 거다. 

무협소설이니 책보다는 영상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티빙에서 녹정기 1984를 봤다. 위소보에 양조위, 청나라 황제에 유덕화가 나와서 기대를 했는데, 책과 다른 전개에 자막을 읽어야 하고 특수효과도 허접해서 1편과 마지막편만 보고 말았다. 

 

녹정기는 1969년 10월 24일 명보에 연재되기 시작해 1972년 9월 23일, 2년하고도 11개월 동안 연재를 했다고 한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몰입감이 최강이라니, 그저 놀라운 뿐이다. 무협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그만~ 토지로 다시 가야 하지만, 꿀벌의 예언이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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