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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로열패밀리의 결혼 | 왕이 될 수 없는 왕자와 공주의 혼인

지금은 비혼이 대세인 듯 하나, 17세기 조선은 혼인을 해야만 하는 사회였다. 왕이 될 사람의 결혼은 영화나 드라마로 통해 많이 접했다. 하지만 왕이 될 수 없는 왕자와 공주의 결혼은 어떠했을까? 아버지가 임금이니 로열패밀리라 할 수 있지만, 왕이 되는냐? 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에 이름을 남긴 왕의 자녀는 모두 273명이다. 왕녀는 121명, 왕자는 152명이지만, 높은 유아사망률 때문에 혼인한 공주와 왕자의 숫자는 더 줄어든다. "17세기 조선 로열패밀리의 결혼"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왕실자료인 가례등록과 명안공주가례등록을 활용해 엮은 책이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난 모란!

조선시대에도 딸바보 아빠가 있다? 없다?

조선에서 대표적인 딸바보 아빠는 효종일 것이다. 그는 4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모두 1남 7녀를 낳았다. 배필인 인선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현종과 딸 숙신, 숙안, 숙명, 숙휘, 숙정, 숙경 공주를 두었고, 후궁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숙녕옹주를 두었다. (공주는 중전이 낳은 딸, 옹주는 후궁이 낳은 딸)

 

효종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궁으로 자주 불러들였는데, 그 딸이 오지 않은 경우 따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은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다.

[너는 어찌하여 이번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어제 너의 언니는 물론, 숙휘까지 패물들을 많이 가졌는데 네 몫은 없으니. 너는 그 사이만 하여도 매우 안 좋을 일이 많으니 내 마음이 아파서 적는다. 네 몫의 것은 어떤 악을 쓰더라도 부디 다 찾아라. 죄지은 것이야 무슨 다른 죄를 지었겠느냐? 이번에 아니 들어온 죄인가 싶다. 이렇게 들어오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은 전부 네 남편인 심철동 때문에 생긴 것이니 그를 들볶고 싸워라.] (본문 중에서)

부부싸움을 종용할 만큼 효종은 딸바보 아빠가 확실하다. 

 

사랑스런 딸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개의치 않아

공주의 혼례를 담당한 예조에서는 '공주궁과 부마가 수리하는 칸수와 규모가 전례에 따라 도를 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엄격하게 명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딸바보 아빠의 마음은 이와 달랐다. 시집간 딸들에게  제도를 벗어난 큰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토지를 불법으로 소유해 물의를 일으켜도 공주 편이었다고 한다. 

[숙안공주 혼례 이듬해에 토지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의 충청도인 홍청도에 공주 소유의 땅이 있었는데, 이를 조사하는 것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있었는가 하면, 같은 해에 공주궁의 종이 나라 땅을 주인 없는 묵은땅이라 핑계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으려 한 일이 전남 감사에 의해 보고되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이번에는 버릇없는 공주랄까?

[더운 여름날 노모가 밭일을 하고 있는데, 공주(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보고 화각 난 동평위 정재륜이 공주를 꾸짖었다. 공주가 궁으로 달려가 울며 동평위를 귀양 보내 달라고 청하자 효종은 그를 잡아들였는데, 동평위는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후 짚신 두 켤레를 더 메고 하직 인사를 했다. 효종이 짚신 두 켤레는 웬 것이냐 묻자, 옛말에 여필종부라 했으니 공주와 함께 귀양을 가기 위함이라고 했고, 이에 효종이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위 에피소드를 한 줄로 줄이면, 뛰는 임금 위에 나는 사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이팝나무꽃!

왕실 가족은 축복일까? 아닐까?

사극 드라마를 보면, 중전의 자리를 탐내고, 중전이 된 후에는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 그런데 실제는 임금의 아내는 물론, 공주의 남편과 왕자의 아내도 그리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첫번째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역시 돈이다.

[양반 사대부가에서는 왜 이토록 처녀 단자 제출을 기피했을까? 먼저 간택 참여에 많은 경제적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의장의 장만에 있어 최소한의 복색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입궐할 때 필요한 가마를 세내고 가마꾼의 노임을 지급해야 했다. 지방에 사는 경우에는 미리 상경해 대기하는데 이때 추가되는 경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는 집이 극히 빈곤해 의상을 해 입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치맛감은 죽은 형제가 쓸 것으로 하고 옷 안은 낡은 것을 넣어 입히고 다른 결속은 빚을 내서 마련했다고 한다.

 

두번째는 사가에서 왕녀에 대한 부담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며느리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보다 고귀한 신분의 왕녀를 부인이나 며느리로 맞이한다는 것은 당사자나 그의 가문의 입장에서 광영일지 모르겠으나, 실제의 생활에 미칠 불편함과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기에 선뜻 그 길을 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법도가 엄격하고 절제된 삶에 있어서 궁중과 양반 사가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권력 투쟁의 연속 속에서 왕실과 가문의 안위를 돌보아야 하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삶에 위태로움을 느끼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세번째 이유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사전에 장안에 퍼진 내정설은 단자 제출을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화순옹주의 경우, 실제 초간택에서 영조가 김한신의 참석을 고대하면서 취해진 조처들이 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인조반정 직후, 서인 세력들이 물실국혼(국혼을 놓치지 말라)을 기치로 내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양반 사대부들은 사전 밀약의 가능성이 농후했던 정치 환경에 익숙해 있었다.] (본문 중에서)

 

마지막 이유는 [혼약을 맺었거나 혼삿날을 앞두고 있던 처녀 총각의 집안에서는 단자 제출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비 사돈 집안에서의 단자 제출은 가문 사이에 형성된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 행위로서 이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이들에게 단자 제출을 강요하는 것은 국왕의 절대권력이 양반 사대부 사회의 통혼 질서를 왜곡하고 훼방하는 일이었다.] (본문 중에서)

와~ 결혼을 약속했는데, 국혼으로 인해 못한다? 간택에 앞서 예조는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는데, 왕실 구성원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 사대부가의 10세 안팎 규수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이는 왕(왕세자)이나 왕자녀의 혼인 대상으로 좋은 배우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신분제 사회에서 결혼은 누가 먼저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었나 보다.

 

아무리 딸바보 아빠가 있다고 해도 공주는 왕이 될 수 없기에, 왕보다 더 화려하게 결혼식을 하지 못했다. 또한 아버지가 왕이 아닌 대군의 신분이라면 그 자식은 왕자와 공주급이 아니라 낮춰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이래서 그렇게도 왕이 되고 싶었나 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17세기 로열패밀리의 결혼'을 읽고 나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구나 싶다. 역사덕후에게는 추천, 역사에 관심이 그닥 없다면 비추천이다. 

https://www.aks.ac.kr/cms/usr/wap/selectAplctnData.do?siteAplctnId=publishedBookAks&bookSeq=5102768&lang=kor&menuNo=2010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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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로열패밀리의 결혼

www.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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