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동 미네르바 (feat. 공씨책방)
카페인에 약하기도 하지만, 커피 = 쓴맛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달달한 믹스커피와 바닐라 라떼를 즐겨 마셨다. 아메리카노는 연하게를 넘어 여러 번의 얼음 리필로 커피맛이 나는 맹물로 마셨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쓴맛에 감춰져 있던 고소하고 묵직하며 깊은 맛을 찾았다. 커피를 향이 아닌 맛으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원두커피 전문점 미네르바다.
카페 미네르바는 1975년 신촌에 처음 생긴 원두커피 전문점이다. 클래식과 원두커피를 좋아하던 연세대 음대를 다니던 당시 건물주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카페 문을 열었다고 한다.
미네르바는 1971년에 오픈한 독수리 다방과 함께 신촌을 대표하는 카페 혹은 다방이다. 폐업에 재오픈하면서 새롭게 확 바뀐 독수리다방과 달리 미네르바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나저나 서울미래유산 현판은 알겠는데, 김현식 골목길은 뭐지? 신촌에 갈 일이 또 생겼다.
그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시간여행자가 됐다. 미네르바에 오는 옛손님들은 바의 모습과 진열장, 나무 천장, 벽, 격자형 창문에 의자, 테이블, 전등, 난로도 예전과 같다고 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음대생 주인장에서 지금의 주인장으로 사람은 달라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클래식 음악이 미네르바를 가득 채우고 있다. 주말에는 2시간이었나? 찾는 이가 많아서 시간을 정해 놓고 있지만, 평일 오전 시간은 사진에서 보듯 널널하다. 이날 첫 손님이었다는 거, 안 비밀이다. 참, 오픈시간은 10:30~21:30이며, 월요일은 휴무다.
미네르바에 대한 음대생 주인장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가운데가 내려 왔다고 해야 하나? 휘어졌다고 해야 하나? 반듯하지 않다. 이는 음악이 실내에 잘 울려 퍼지도록 고도의 계산 아래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미네르바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커피를 만드는 방식이 독특해서다. 일반적으로 원두 위에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지만, 사이폰(syphon)은 진공 커피포트로 증기압을 이용한 추출방식이다. 즉, 압력을 이용해 끓는 물을 원두 쪽으로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린다. 이렇게 하면 미세입자까지 걸러져 풍부한 향에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미네르바에 왔으니 사이폰 방식으로 추출한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기본이 2잔이다. 요즘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지만, 한번에 2잔은 무리다. 드립으로 갈까 하다가, 커알못에게 명품(?)은 어울리지 않아 무난한 얼음 동동 아메리카노(6,000원)를 주문했다. 이때만 해도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알못(커피 맛 모르는 1인)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은 커피 원두는 묵직함, 균형감, 다크초콜릿이라고 메뉴판에 나와있다. 디카페인이나 산미가 있는 원두로 변경이 가능한데 500원 추가로 내야 한다. 음식은 상큼, 새콤을 좋아하지만, 커피는 무조건 고소함이다.
커피가 이정도 때깔이면 사약처럼 쓴맛만 가득해야 한다. 그런데 원두의 차이일까? 머신의 차이일까? 만드는 이가 달라서 그런 것일까? 쓴맛보다는 묵직하면서 깊은 맛이 느껴진다. 목넘김 후에는 고소함까지 지금까지 마셨던 그 어떤 커피보다 단연코 월등히 끝내준다. 드립으로 마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프랑스 발로나 초코칩 피칸 쿠키(3,000원)를 잡는 순간 바삭함이 아닌 꾸덕함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쿠키이며, 피칸의 고소함과 초콜릿의 달달함이 커피와 잘 어울린다.
김현식 골목길 탐방을 할 때 다시 찾을 예정이다. 그때도 혼자라면 사이폰은 무리고, 대신 드립 커피를 마실 거다. 나의 첫 드립커피를 미네르바에서 시작하고 싶다.
어릴때는 동네서점에 헌책방까지 지금과 달리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도서관보다는 가까운 동네 책방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요즈음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읽는다. 들고 다니기 귀찮으니깐.
공씨책방이 유명한 이유는 창업주 공진석 씨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인문사회과학 책이 들어오면 모두 읽고 나서야 판매를 했고, 손님이 관련 분야를 이야기하면 그에 적절한 책을 추천해줬다고 한다. 199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그를 아꼈던 사람들이 글을 모아 '옛책, 그 언저리에서'라는 유고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공씨책방은 창업주의 처조카가 2대 운영자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장소로, 헌책방을 모르고 자란 누군가에게는 멋진 추억을 안겨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엽서 속 그림이 실제로 짠~ 새책은 전자책으로, 중고책(헌책)은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가고 있는데, 변화를 줘야겠다. 전자책은 포기할 수 없지만, 헌책은 알라딘에서 공씨책방으로 간다.
2023.05.02 - 신촌 만남의 장소 창천동 독수리다방 (feat. 구신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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