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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발굴문화재

어렸을때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땅 속에 파묻힌 역사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탐험을 떠나는 꿈을 꿨지만, 현실은 지극히 평범한 역사 덕후다. 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장면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고고학자가 되어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광화문광장 발굴문화재 현장 탐방이다.

 

섬이었던 광화문광장은 육지(?)가 되기 위해 현재 공사 중이다. 관계자외 출입금지인 이곳을 당당히 들어왔다. 이유는 광화문광장 아래 매몰되었던 발굴문화재를 견학하기 위해서다. 광화문광장 시민참여단이기도 하고, 역사덕후로서 이런 기회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고고학자가 들려주는 광화문광장 일대 매장문화재 이야기!

조선 태종때 행랑조성도감이 도성 간선도로에 장랑을 건설하고, 간선도로의 폭도 일정하게 정비하면서 육조관청이 광화문 앞에 동서로 도열하는 육조거리가 탄생했다. 조선초기에 지어진 육조거리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별 변화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육조거리의 양측에 건설되었던 관아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그나저나 의정부터는 진작에 발굴 중이니 제외를 하더라도, 삼군부, 사헌부, 우물터, 수로 등 문화재가 남아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다. 도로여서 보존이 됐지, 건물을 지었다면 남아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본격적인 견학 전 교육은 필수다. 그 전에 온도체크와 명부를 작성했으며, 안전모와 조끼도 입었다. 남들에 비해 내 안전모가 큰가? 아니면 내 머리통(?)이 작은가? 안전모 뒤에 있는 끈(?)을 조여 조절을 하면 되는데, 그걸 모르고 한참을 안전모가 크다고 혼자서 툴툴댔다.

 

사진에 나와 있는 모든 곳을 다 가고 싶었으나 2곳만 허락이 됐다. 여기는 정부중앙청사 앞이자, 광화문에서 가장 가까운 삼군부 영역이다.

 

삼군부는 조선말기의 군사기관이다. 양란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은 고종이 즉위 후,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지휘하에 경복궁을 중건하게 된다. 이때 육조거리는 다시금 궁궐 앞에 조선 최고위 관청들이 좌우에 도열한 건국 이래의 형세를 되찾게 된다.

 

수로의 흔적은 알려주지 않아도 확실하 알겠는데, 나머지는 강의를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사진 찍는데 집중을 하다보니, 메모를 못했다. 

 

퇴적층은 아니지만,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저나 아스팔트를 이렇게 두텁게 깔다니, 이래서 아래 매몰되어 있던 문화재가 훼손없이 견딜 수 있었나 보다.

 

기념을 하고 싶다고, 작은 돌 하나라도 챙겨가면 절~대 안된다. 왜냐하면 다 유물이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광장 아래 이런 문화재가 잠들어 있었다니, 보고 있는데도 신기하다.

 

시대에 따라 땅 높이가 달라졌으니, 광화문을 바라보는 높이도 달라졌을 거다. 가장 아래에 내려와서 광화문을 바라보니, 확실히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임금을 하늘처럼 섬겼던 백성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 말 듯?

 

색이 부족해서 그런게 아니라, 시대별로 구분해 놓은 거라고 한다. 노란색이 가장 오래됐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노란색 - 흰색 - 분홍색이 시대순인데 확실하지 않다. 

 

광화문 바로 옆에 있는 해치상의 원래 위치는 육조거리 부근(100미터 가량)에 있었다고 한다. 경복궁에 가기 위해 말이나 가마를 타고 왔던 사람들은 해치 앞에서 모두 다 내렸다. 여기부터는 궁궐의 영역이라서 탈 것에서 내려 걸으라는 의미였다. 광화문광장이 재조성되면 해치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올 계획이라고 한다.

사헌부 전각인 충무당은 돈암동 삼선공원에, 청헌당은 육군사관학교에 있다고 한다. 해치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좋을텐데...

 

여기는 사헌부 영역이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구다. 가장 가까운 현대식 건물은 세종문화회관이다. 

 

육조거리 추정 배수로 석렬
우물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식민통치 체제가 시작되었다. 육조거리는 광화문통으로 개칭되면서 노폭이 좁아지게 되고, 대로 주변 관청 배치 역시 이전과 전혀 다른 식민체계를 방영한 모습으로 달라졌다. 광화문을 옮겨 박람회 정문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다. 욕이나 한바가지 하는 걸로.

 

담장 및 행랑 추정지역 

총 7곳에서 문화재가 나왔지만, 모두 다 복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6월 1일부터 발굴된 유구를 양질의 흙으로 덮어 현지 보존한다고 했으니, 귀한 체험에 사진까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을 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둔 거라고 해야 할까나? 그래도 덮는다고 하니 많이 아쉽다. 

 

달라진 광화문광장을 걸을때마다 이 아래에 엄청난 보물(유물)이 숨겨 있다고 말할 것이다. 보물이 뭐나고 물어본다면, 이 글과 사진을 보여줘야지. 월대도 복원한다고 하던데, 내년 봄 다시 태어날 광화문광장을 기대해 본다. 전면취소가 될까봐 무지 걱정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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