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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읽음

혜경궁 홍씨 지음 한중록 | 중전이 되지 못한 세자빈 대비가 되지 못한 왕의 엄마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파싸움이 가장 큰 원인인 줄 알았다. 탕평책이 뭐길래 아버지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리고 남편이 곧 죽는데, 아내인 헤경인궁홍씨는 왜 가만히 있을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대비가 되고 싶은 욕심때문이로구나 했다. 

 

하지만 혜경궁홍씨는 세자빈이었지만 중전이 되지 못했고, 왕의 엄마이지만 대비가 되지 못했다. 중전이 되지 못한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비마마까지 되지 못한 건 혜경궁홍씨가 지은 한중록을 읽기 전까지 몰랐다. 역사 교과서나 드라마, 영화는 그녀보다는 영조, 사도세자, 정조 이들의 관계를 주로 다루다 보니, 그녀의 이야기는 동시대인물이긴 하나 비중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한중록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 본인의 직접 겪은 이야기를 쓴 자서전같기에, 100% 다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감추거나 크게 다루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왜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녀가 했던 여러 일들은 허구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궁의 규율과 법도가 그리도 엄한지 정말 몰랐다. 남편을 위해 한번쯤은 시아버지인 영조에게 직언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벙어리 냉가슴만 앓다가 중전도 대비마마도 되지 못하고 60년을 세자빈이자 왕의 엄마로 궁에서 보내야했다. 한중록을 읽는내내 왜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냐고, 우리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 말 한마디 하는게 그리 어려웠냐고 되물어보고 싶다.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는 조선의 21대 국왕인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세자빈이다. 그리고 22대 왕인 정조의 생모이기도 하다. 한중록은 6부작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는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가는 내용으로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와 세자빈이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1부가 로맨틱 멜로라면, 2부부터는 스릴러에 막장 그리고 아비규환이다.

 

2부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가 극에 달하다 / 3부 사도세자 뒤주에서 천둥소리 들으며 죽다 / 4부 나와 내 치정에 대해 기록하다  / 5부 역적의 집안이 된 친정을 변명하다 / 6부 정조와 순조 그리고 나의 한 많은 인생으로 되어 있다. 2부부터는 아들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집필을 했으며, 이는 어린 왕인 순조에게 보이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집필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아들인 정조는 왜 아버지가 죽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손자인 순조는 모를 수 있기에 그때 그 일을 알고 있는 자신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더불어 역적으로 몰린 자신의 집안도 다시 되찾고 싶었을 거다. 세자빈이 되지 않았더라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집안에 그런 불행은 없었을 테니깐.

 

"아버지께서 흑룡이 어머니가 계신 방의 반자에 몸을 포개어 감고 있는 꿈을 꾸셨으나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므로 태몽과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 정헌공께서 친히 와서 보시고, 비록 여자이나 보통 아이와는 다르다며 매우 사랑하셨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장차 중전이 될 인물이니, 탄생조차 범상치 않았나 보다. 그러나 현실은 남편을 잘못 만난 죄일까? 무서운 시아버지를 만난 죄일까? 세자빈에서 중전 그리고 대비까지는 탄탄대로였을텐데, 그 쉬운(?) 길이 유독 혜경궁 홍씨에게는 어려운 길 아니 절대 갈 수 없는 길이 되어버렸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으니 중전이 될 수 없었고, 장차 왕이 될 아들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바람에 대비도 되지 못했다.

 

혜경궁 홍씨의 본명을 알고 싶었으나, 폭풍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 장옥정(장희빈 본명)은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으나, 다른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가 쉽지 않았던 거 같다. 惠慶宮 洪氏는 궁호로 본명은 아닌데, 한자는 다르지만 혜경이라는 그 이름땜에 예전부터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전생의 내모습? 괜한 상상을 참 많이도 했었다. 아들이 정조인 거 좋은데, 남편은 왜 하필 사도세자일까 하면서 투덜대기도 했었다.

 

"처음 당하는 참변이라 슬프고 애달픈 것이 하나는 어리신 아기를 저승전에 멀리 두신 것이요. 둘은 괴이한 내인들을 들여오신 까달이니 이것은 여편네의 잔소리가 아니라 사실의 단서를 대락 말한 것이다."(본문 중에서) 

저승전 저편의 취선당이라는 집은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집이었다. 그런 곳에 어린 아기(사도세자)가 홀로 있었고, 장희빈의 처소를 소주방으로 만들었으니 다 예측된 비극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음속에 화가 올라오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같은 짐승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풀립니다."

"어찌하여 그리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리합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상하느냐?"

"부왕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리합니다."(본문 중에서)

나라의 왕이자 세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집의 아빠와 아들이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아들이었는데, 영조는 왜 그리도 무심하게 대했을까? 당파싸움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할 시기에 그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자의 보전함이 다 임금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러자 영조께서 손을 잡고 우셨다. "네가 이럴 줄을 생각지 못하여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렵더니, 내 마음을 편케 해 주니 아름답다." 이 말씀을 듣고 내 심장이 더욱 막히고 모진 목숨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세손이 떠나면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아뢰었다. "세손이 떠나서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를 모시고 배우기는 큰일입니다." (본문 중에서)

남편이자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금쪽같은 아들을 맡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다. 

 

"서럽고도 서럽도다! 차마 갑신년(영조 40년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봉한 일)의 일을 어찌 다 일컬을 수 있으며 그때 몹시 애달프고 망극하여 모자가 서로 붙들고 죽을 바를 모르던 모습이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느냐? 선왕(정조)께서 겪으신 지극한 아픔이 예로부터 제왕가에 없는 일이니, 비록 나라를 위하여 임금의 자리에 임하시나 한평생 아픔을 품으시고 추모하심이 해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셨다. (본문 중에서)

 

삼촌이 조카를 죽이거나, 형이 아우를 죽이는 건, 본인이 왕이 되려고 하는 욕망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은 죽인 건, 어떤 욕망일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아들은 그 사랑이 부족해 병이 생겼는데, 아버지를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혼을 내기만 했다. 사랑의 매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매 앞에 사랑이 먼저 붙는다. 즉, 매보다는 사랑을 먼저 줬더라면 조선왕조 역사에 그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는 남들이 다 그러하듯, 세자빈에서 중전이 되어 대를 이을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왕이 되어 그녀는 대비마마가 됐을 거다. 그랬다면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 혜경왕후가 됐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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