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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영화로 제작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개봉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댜큐영화는 개봉 첫주가 중요한다는데, 8월 8일 개봉 첫날 생각보다 적은 관람객에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는 이들을 보니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모두가 훌쩍 모드다. 나 역시 미리 손수건을 준비해 갔고, 3~4번 정도 무음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흥행 성적은 그리 좋다고 볼 수 없지만, 최근의 상황과 입소문으로 롱런을 했으면 좋겠다. 영화에 대한 줄거리보다는, 할머니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17년 2월, 3월 그리고 8월, 김복동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를 처음 만날 날.

2017년 2월 22일,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함께 발간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과 관련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연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처음 뵈었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가 아니라 직접 할머니를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다. 몸이 많이 불편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역사를 팔아먹어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아직도 한을 다 풀지 못했다. 1억원 받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다. 우리들도 귀한 집 자식이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명예회복이 될때까지 싸우겠다." 이때만 해도, 믿지 못할 정부로 인해 앞이 깜깜했지만,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2017년 3월 1일, 1272번째 수요집회에 갔다. 부끄럽지만, 집회 참석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삼일절이자 수요일이었고, 광화문에서 촛분집회까지 있어 서둘러 나갔다. 소녀상이 철거될까봐 추운데 노숙하는 나비들이 많았는데, 고맙고 힘이 되지 못한 어른이라서 미안했었다. 이날은 김복동 할머니와 집회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씀하신 이용수 할머니까지 뵈었다. 물론 먼발치에서... 

탄핵 인용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탄핵이 됐다. 그리고 촛불의 힘으로 정권이 바꿨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가 여전히 지들 식민지로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지들이야 말로 우물 안 개구리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토착왜구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깨어있는 시민이 있는 한 그들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3번째 그리고 마지막

남산공원 통감관저터에는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되어 있다. 2017년 8월 26일 1주년 기념행사에서 마지막인지 모른채 할머니를 만났다. 영화에서 이날 할머니의 모습이 나와, 또 울컥했다. 노래를 발표해 신인가수가 된 길원옥 할머니도 함께 만났다. 속으로 2주년에도, 3주년에도 또 만나요라고 했는데...

아픈 기억은 묻어두는 게 좋다. 생각날때마다 계속 아플테니깐. 하지만 아픈 역사는 절대 묻으면 안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도, 김봉동 그 이름도 잊지 않겠습니다.

 

양산에서 부산 - 시모노세키 - 대만 - 광동 - 홍콩 - 수마트라섬 - 싱가포르까지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는 1926년 5월 1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그리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는데, 보증이 잘 못 돼서 땅을 읽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만14세때, 일본사람이 찾아와 데이신타이(정신대)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 놓으라고 했다. 그사람은 어머니에게 데이신타이는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끌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중국 광동에 도착했다. 위생병원 같은 곳으로 가서 일본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다. 검사 후 어떤 건물로 갔는데, 거기가 바로 위안소였다. 복도 사이로 양 옆에 방이 주욱 있었는데, 방이 30개는 되었던 거 같다. 그날 밤 낮에 우리를 검사한 군의관이 내방으로 들어왔다. 무서워서 도망쳤으나 곧 잡혔다. 한참을 맞고 나니 얼굴 전체가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틀날 방에서 나오니 여자들이 저마다 피빨래를 하고 있었다. 

 

홍콩 위안소에서 석달쯤 있다가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민간에서 외진 곳으로 멀리에서 대포소리가 자주 들렀다. 가끔 산 속 갚은 곳의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천막 하나를 임시 위안소로 만들어 놓고 합판으로 칸을 나누어 서너 명씩 들어가도록 했다. 군인들이 하도 많이 들이 닥쳐서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몇 달 있다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이동을 했다. 어느 날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 보름 후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차를 타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그 곳은 제10 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는 우리 같은 여자들이 300명정도 와 있었다. 열 다섯살(만 14세)에 집을 떠났다가 8년째 되던 해(22세) 고향에 돌아왔다. 2019년 1월 28일, 1년 여의 암 투병 끝에 94세를 일기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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