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금엉금 기어가 가는 건 악어인데, 빠르고 빠른 KTX가 엉금엉금 기어서 갔다. 포항에서 서울까지 2시간 30분이면 되는데, 6시간만에 왔다. 사고가 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원래 계획대로 실컷 놀다 오는건데 사람인지라 앞일을 몰랐다. 뜻밖에 갑자기 일어난 좋지 않은 일을 사고라 한다. 직접 사고를 겪지 않았지만, 후폭풍으로 인해 오송역을 지나가야 하는 모든 KTX는 악어떼로 변했다. 검은색은 도착 예상시간이고, 파란색은 실제 도착시간이다. 비둘기호를 탔나 싶을 정도로, 와우~
원래 일정은 이랬다. 구룡포에서 과메기 먹고 호미곶으로 넘어가 일출이 아닌 일몰을 보려고 했다. 일출은 볼 자신이 없으니, 일몰이라도 보려고 했는데, 급 약속이 생겼다. 9시까지 서울로 가야해서, 과메기만 먹고 포항역으로 왔다. 6시도 안됐는데, 하늘은 어느새 밤으로 넘어가고 있다. 힘들게 서울에서 포항까지 와서, 과메기만 먹고 가는게 과하다 싶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먹고 싶었던 산지 과메기를 먹었으니 이걸로 만족하자 했는데, 기차에서 6시간을 보내줄 정녕 몰랐다.
역에 늦지 않게 도착을 했고, KTX에 탔다. 6시 출발인데, 어라~ 출발을 안한다. 무슨 문제가 있나 했지만, 금방 떠날거라는 생각에 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는데도 출발을 안한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오송역에서 사고가 일어났단다. 복구는 됐다는데, 당분간 열차 지연이란다. 여기는 포항역이고, 오송역까지 가려면 어느정도 시간이 있으니 가다보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후 기차는 출발을 했다. 이때가 6시 40분이었다.
복구가 됐다고 하니, 40분 정도 지연은 애교로 봐주자 했다. 그러나 동대구역에 도착한 후, 움직임이 없다. 안내방송은 죄송하다, 오송역 사고로 모든 열차가 줄줄이 멈춰있다. 양해를 바란다. 같은 말만 반복중이다. 이때 든 생각, 얼마전 KTX 지연시 환불받는 방법에 대해 글을 쓴적이 있는데, 혹시 상상이 현실이 된건가? 아무리 그래도 굳이 현실로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필 이딴 상상은 현실이 되는지 모르겠다.
코레일톡 앱에 들어가니, 지연배상을 신청하는 페이지가 있다. 40분 이상일때부터 가능하다고 했는데, 어느덧 지연시간은 몇십분을 지나 시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연할인증 쿠폰을 확인해볼까나 했는데, 아뿔사~ 이번 포항여행은 현금이 아니라 쿠폰으로 티켓을 구입을 했다. 쿠폰이 있어 사용을 했던건데, 지연배상에서 쿠폰은 제외다. 내돈~~이 아니라, 내시간 돌리도~~
또 어찌어찌 대전역까지 왔다. 역에 도착을 할때마다 모니터에 도착 안내글과 함께 승무원은 이번에 내리는 역은 대전, 대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어느쪽이고, 원래 예정시간보다... 그동안은 길어나 10분 지연이 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멘트가 나오는 건데, 이번에는 "원래 예정시간보다 3시간 늦게 도착했습니다." 동대구역에서 안내 방송이 나올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는데, 해탈의 경지랄까? 대전역에는 웃음소리뿐이다.
열차시각을 보면, 동대구역이나 대전역에서 2분이내 출발을 했다고 나오는데 아니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다림이 있었고, 막상 출발을 하면 그나마 속력을 냈다. 포항에서 동대구, 동대구에서 대전까지는 기차가 출발을 하면 원래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렸다. 그러나 최악의 코스는 대전역에서 오송역사이였다. 거짓말 1도 안보태고, 처음에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나중에는 엉금엉금 기어서 갔다. 뒤에 앉은 어떤 분 왈, "차라리 자전거가 빠르겠다." 정말 그 정도였다.
대전에서 오송까지 20분도 안되는 거리를 두시간이 넘도록 기어갔다. 정말 꿈이었으면 했다. 지루함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때 광명역이길 바랬다. 오송역에 도착했을때는 20일에서 21일로 날이 바꿨다. 이런 속도로 서울역에 도착을 하면 아침이겠구나 했는데, 사고구간이던 오송역을 지나자마자 기어가던 KTX는 다시 고속열차로 변했다. 즉, 겁나 빠르게 달렸다. 원래 그 속도였을텐데, 평소보다 200km는 더 빨라진 듯 싶었다.
9시 급약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지 오래, 이젠 남은 건 서울역에서 집까지 어떻게 가지? 버스와 지하철은 끝났을텐데, 광명역에 내려 택시를 탈까? 지연배상도 못받는데 택시비까지 좀 너무한데 싶을때, 승무원에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운행한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사실은 주워들은 건데, 건너편에 앉은 남성분이 인천이 집이었고, 광명역에서 인천가는 셔틀버스에 대해 물어봤던 거 같다. 셔틀은 끊겼지만, 지하철은 있다는 말을 귀가 밝아서 주워들었던 거다.
그런데 이 남성분 서울역이 아니라 광명역에서 내렸고,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광명역에서 내렸다. 오랜 시간 열차를 탔으니 지겨울만 한다. 지하철이 운행한다고 하지만, 종점이 인천이 아니라 구로라고 누군가 말을 했던 거 같다. 어차피 택시를 타야 하는데, 서울역까지 가는 것보다는 광명이 더 빠르다. 나도 살짝 고민이 됐다. '광명에서 내려서 택시를 탈까? 서울역으로 갈 시간이면 새벽이라 차도 안 막혀서 금방 도착을 할텐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에 서울역까지 갔고, 역에 내리자마자 안내방송이 들렸다. 지금 지하 서울역에서 인천행 지하철이 대기중이다. 이때 필요한 건 스피드다. 잽사게 달려가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심야버스로 환승을 한 후 집에 왔다. 포장해서 가져온 과메기는 더운 KTX 안에서 홍어라 착각을 했는지 포장용기에 기름이 흐를 정도로 푹 익어버렸다.
기차여행 무지 좋아하는데, 트라우마가 될까 겁이 난다. 직접 사고를 겪는 분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닐테지만, 하염없이 기차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건 너무 힘들었다. 대전역에 도착했을때, 사고로 인해 이러저러해서 역에서 얼마정도 있을 거 같다. 혹시 배가 고픈 분이나 갈증나는 분들은 잠시 나갔다고 다시 와도 된다. 이런 안내방송이라고 해줬으면, 화가 덜 나지 않았을까? 그러면 성심당에 들려, 빵을 사왔을텐데, 아니면 가락국수라고 먹었을텐데. 이럴줄 알았으면, 포항에서 좀 더 놀다오는 건데, 과메기 하나 먹자고 들인 시간과 정성이 너무 아까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메기는 참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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