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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이민사 박물관이 있다는 것도 처음. 장소가 인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왜 인천일까? 인천 이민사도 아니고, 한국 이민사라면 당연히 서울에 있어야 맞는데 왜? 역사덕후라면서 그동안 이민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로 인천 월미공원에 있는 한국 이민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인천역은 한국철도 탄생역

인천역은 지하철 1호선 마지막 역이다. 인천에 주기적으로 가고 있지만, 차이나타운은 아직이다. 이번에는 가볼까 했는데, 건너편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걸로 만족.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을 슬쩍 쳐다본 후, 버스를 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700만 해외동포들의 이민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인천시 시민들과 동포들이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 박물관이다. 왜에 대한 궁금증이 여기서 바로 풀렸다. 인천은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다고 한다. 



인천은 백제부터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교류를 하는데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외국 선박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왜란과 호란은 겪으면서 인천 해안지역은 국방상 요충지로 부상했다. 중국와 일본에 이어 조선도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인천은 국제 개항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 교통이 폐쇄된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 지역사회가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을 했지만, 서구 열강의 이권 개입 경쟁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계속되는 가뭄으로 혹독한 굶주림이 지속됐다. 이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하와이 이민 모집을 보고, 이민을 결행하게 됐다. 당시 하외이는 설탕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됐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S. S. Gaelic)의 조선인 승선자는 102명이었다. 1902년 12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903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질병자 16명을 제외하고, 86명만이 상륙허가를 받았다. 승선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천 출신이었는데, 이는 인천에 있던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고, 이민자 중 교회 출신 신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총 64회에 걸친 항해에 이민자는 7,414여 명이었다.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 농장에서 다른 민죽들과 더불어 생활을 했다. 사탕수수농장에는 십장인루나의 감시를 받았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힘든 노동도 견뎌야만 했다. 이들에게 가장 힘든 점은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제도의 압박감이었다고 한다. 한 달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번호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1905년까지 어른 남자의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1920년까지 하와이에 온 한인 7,400여명 중 2,000여 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했고, 약 1,000여명만이 조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남아 있는 대다수는 한국의 정세불안과 일본의 조극 강점 등으로 부득이 정착을 택했다. 더 많은 돈벌이를 위해 농장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거나 본토로 이주해 가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미국 본토로 간 한인들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각 지역 특성에 맞게 하와이에서는 농사를 시카고와 뉴욕에서는 채소상과 식당업을 하면서 정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독립운동 기여도는 매우 컸다. 임시정부를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아까지 않았다고 한다. 



멕시코, 쿠바 이민사


러시아 이민사


중국 이민사


일본이민사

미국 이민사를 지나, 제3전시실로 오면 멕시코, 쿠바, 러시아, 일본, 중국, 중남미, 독일 등 전세계 이민사를 볼 수 있다. 이중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나라의 이민사는 멕시코와 쿠바다. 1905년 1,033명의 한인들은 제물포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했지만, 이는 이민 중개인에 의한 단 한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간 이들은 에네켄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4년간 강제 노동을 했다. 


4년후 계약이 끝나 해방됐지만,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멕시코 한인 중 288명은 다시 쿠바로 재인민을 가게 된다. 단 한차례로 끝난 이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과의 혼혈이 증가하고 모국어도 잊어가면서 민족성 정체성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고 한다. 쿠바고 떠난 이들 역시 처음에는 집단촌에 쿠바지방회까지 설립했지만, 쿠바내정의 변화에 휩싸여 단체는 와해되고 정체성의 상실도 가속화됐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파독광부와 간호사는 1960년대 한국의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의 필요성, 독일의 부족한 노동 인력 공급과 경제 원조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독일 이주가 본격화 됐다. 247명의 1차 파독광부를 시작으로 1970년대 말까지 약 8천여 명의 광부들과 약 1만여 명의 간호 여성들이 독일로 떠났다. 이민사는 주로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줄 알았다. 독일 이민은 환경은 다르지만, 상황은 그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이민 역사 중 가장 아프고 가장 치욕스런 역사는 해외 입양이 아닐까 한다. 1950년대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및 혼혈아동 문제로 해외 입양이 시작됐다고 한다. 빈곤 가정의 아동과 미혼모의 아이들 입양으로 이어졌고, 점차 그 수가 늘어나 1980년대에는 해외 입양인 수 세계 1위 국가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현재는 정점을 이르렀던 1985년 수치의 5%내외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하는데, 0%가 되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길.



인하대는 인천 하버드라고 누군가 알려줬을때,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가 정말인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하대는 인천 + 하외이의 약자다. 왜냐하면 미주 한인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고 모국의 공업회를 돕고자 첫 이민을 떠났던 인천에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인천은 대한제국 공식이민 출발지이자, 현재는 고국을 찾는 재외동포들의 마음의 고향같은 곳이라고 한다. 인천에 이민사 박물관이 있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것이다. 그들의 피땀눈물이 담아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 이민의 역사 역시 우리 역사임을 절실히 깨닫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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